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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퍼노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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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보완계획'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06.06
    오타쿠 해석의 반론과 인류보완계획

"유즈리하 아빠" 님께서 신비로 애니피아 감상게시판에 2004년 5월 24일에 적으신 글입니다
에바에 관련된 글 중에 가장 잘 정리된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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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올라온 에바 마지막에 관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사실, 글과 그 반응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이미 극장판이 나온 직후에 끝난 것으로 보였던 해석논쟁이 아직도 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스토리를 미리 만들지 않고 그때그때 끼워넣었다는 것은 과장된 얘기입니다.

각각의 에피소드를 조정한 정도이지, 큰 줄거리 자체는 상당히 짜여져 있고, 일부러 모호하게 만드는 ‘앰비귀티’를 사용한 것도 아닙니다.

원래 에바에 대해 줄기찬 해석논쟁이 붙었던 것은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던 TV판의 25화 26화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에바가 그냥 되는대로 만든 것이다.

별 생각할 필요 없는 만화라는 해석은 이 TV판을 둘러싸고 일어난 것이죠.

결국 진정한 결말을 담은 극장판이 나오면서, 해석논쟁은 별 의미가 없게 됐습니다.

에바 극장판은 대단히 친절한 편이며, 별다른 이론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당시 에바 논란을 하다가 극장판을 접한 사람들의 대부분의 반응은 ‘겨우 그거였어?’ 정도의 것이었죠.

이때문에 다소 오버센스였던 여러가지 해석... 에바는 오타쿠의 각성을 촉구한 만화라든지... 하는 것들이 다소 힘을 잃게 됐습니다만,

어느 정도의 맥은 닿아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런 반응이 다소 과장된 형태가 되면서 ‘아무 뜻 없대드라’는 식으로 말해지는 것은 대단히 유감입니다.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서 논문이니 합니다만, 사실은 안노라든지 가이낙스의 밑천은 그다지 깊지도 않았다는 얘기 정도가 바른 표현이 되겠죠.

또, 에바에서 보여준 가이낙스의 기본은 최근에 방송되는 ‘고노미니’에까지 미친다고 보이기 때문에, 기본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극장판을 본 직후에 썼던 글을 다소 리메이크해서 올려봅니다.

사실 일본쪽의 만화를 읽어보다 보면 특이한 것이, 기독교 신자가 거의 없는 나라에서(일본에서는 기독교를 우리나라에서 난묘호란겐교를 보는 정도로 본다고 보면 맞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적인 상징물이나 아이템에 대해서만 밝다는 것입니다.

에반겔리온에는 아마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천사들의 이름이 등장할 것이지만, 사실 어쨋든 일본인에게 예수는 이슬람교의 마호멧과 같은 선지자, 혹은 이방 종교의 잡신과 별 차이가 없는 상황이니까요. 우리가 마음대로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이 나오는 만화를 만들듯이 그들은 마음대로 예수가 나오는 만화를 만듭니다.

그러나 그런만큼 작가의 정신은 기독교와는 하나도 관계가 없습니다.

그건 우리가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만화를 그린다고 해서 고대 그리스인의 정신을 담아서 그리는 것이 아닌만큼, 에반겔리온 안에 들어가 있는 정신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니라 바로 일본인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에반겔리온의 키워드는 바로 '해탈'입니다.

기독교의 상징들을 동원해서 불교의 해탈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별로 해탈이란 키워드를 염두에 뒀다고까지 말하기는 힘듭니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에반겔리온은 방영도중에 그 해석을 놓고 이런저런 말이 많았습니다.

어떤 일본 신문은 에반겔리온이 학생들을 대변한다고 했습니다.

불안한 시기에 무엇을 할지 모르는 시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에반겔리온이란 수험이고, 어려운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캐릭터 디자이너인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인터뷰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했죠.

어떤 사람들은 25화 26화를 보고 에반겔리온이란 오타쿠에게 내는 가이낙스의 메시지라고 했습니다.

만화란 환상에서 깨어 그만 현실로 나오라는 얘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극장판 두편이 나오면서 이런 중의적인 해석은 거의가 힘을 잃게 됐습니다.

마지막 극장판이 너무나도 극명하고 일방적으로 전체적인 의도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여러갈래로 해석될 수 있었던 상징들이 단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에반겔리온 극장판은 많은 가능성을 털어버린 작품이기도 하고, 반면 속시원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에반겔리온은 전체적으로 '개인'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 만화입니다.

사람들은 자아란 것이 있고, 그 자아로 벽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 벽으로 인해 상처입고, 인간관계에서도 그 속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불안한 상태라는 것이 에반겔리온의 전제입니다.

이것은 생로병사 자체가 고민과 번뇌라는 불교의 사상과 닮아있습니다만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에반겔리온은 인간관계에 모든 것을 집중시켜 생각합니다.

신지의 생은 모든 것이 남에 의해 흘러가는 생입니다.

아버지의 부름으로 끌려와서 왜 그래야하는지도 모르면서 겁나는 에바에 탑승해야 합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남의' 의지 때문에. 그리고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는 '타인의 상황' 때문에.


신지는 많은 인간관계로 피곤하기 그지없습니다.

레이의 속은 알 수 없고, 미사토는 자신을 감시하는 것인지 가족으로 대해주는 것인지, 그 속에서 갈등을 겪고, 괜히 경쟁심을 불태우는 아스카는 자꾸 싸움을 걸어옵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친구를 죽이라고 합니다.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으면서 생기게 되는 고통과 갈등이 TV판 1화부터 24화까지 에반겔리온에서 설명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인간이란 모습을 갖고 있기에, 자아와 자아가 서로 상충하며 부딪치기에, 때로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힘들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한차원 높은 영적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계획된 것이 '인류 보완계획'입니다. 인간이기에 가질수밖에 없는 마음속의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한 계획이지요.

그리고 그 한계 극복은 바로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벽인 AT필드를 깨는 것입니다.

AT필드는 자기가 자기이기 위해 가지고 있는 개인과 개인사이의 격벽입니다.

AT필드가 완전히 깨지면 개인의 자아는 무너지고, 서로 섞이게 된다는 것이지요(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이렇게 기존의 차원을 넘어서 한차원 넓은 세계로 나가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에반겔리온의 해탈의 과정은 깨달음으로서 고뇌를 끊는 정통적인 해탈상과는 약간 거리가 멉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해탈이라는 것이 인연의 고리를 끊는다는 의미의 해탈이라고 한다면, 에반겔리온에서는 자아를 버리는 것으로 약간 변형돼 있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완벽’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 뿐일테니... 인간이 서로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은 모두가 불완전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완전해진다는 것은 곧 신이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AT필드가 무너지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여는 과정으로 돼 있습니다.

AT필드는 마음의 '벽'으로 돼 있고 마지막 순간에 그 AT필드를 무너뜨리는 것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의 환상이었습니다.

겐도에게는 유이의 환상이, 마지막까지 두려워하던 오퍼레이터 마야는 동경하던 선배 리쓰코의 환상이 AT필드를 부수는 계기가 됩니다.

마음을 완전히 여는 동시에 사람은 LCL액으로 변해버리게 되지요.

이런 내용은 상당히 일관적입니다. 신지가 싱크로율 400%를 기록하던 상황이 있지요.

신지는 그때 에반겔리온 초호기 속의 어머니 유이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고 동화돼 LCL액이 됩니다.

대체로 이런 생각은 정통적인 의미의 '해탈'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일본인들이 말하는 일본적 의미의 '성불(成佛)'이고 '회귀(回歸)'에 가깝지 않나 합니다.

TV판 '잔혹한 천사의 테제'만 해도 말 그대로 난해하지만, '혼의 루프란'에 이르면 이런 '회귀'를 그냥 대놓고 얘기해줍니다.

나에게로 돌아오거라(회귀)/

기억을 더듬어 다정함과 꿈의 '근원'으로/

다시한번 별에 이끌려 태어나기 위해.../

혼의 루프란(여기서는 윤회)

기본적으로 이것은 나중에 얘기하는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 신으로의 회귀를 말합니다.

사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일본 종교를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개 일본의 신도(神道)라는 것을 우리는 불교(佛敎)의 변용이라고 보지만, 일본 내부에서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가장 극명하게 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 '유리가면'입니다.

유리가면의 '홍천녀'란 연극이 그 두가지의 차이를 보여주는 연극이죠.

이른바 '신'과 '부처'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연극이라고 합니다.

일본에서의 신도와 불교는 적대관계라는 전제를 담고 있습니다.

신지에게 있어서 마지막 선택은 두가지의 뜻을 지닙니다.

어머니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레이의 모습을 보면서, 그 탄생의 연원, 생명의 연원으로서의 어머니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고, 더 넓게는 더 근원적인 생명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신의 품으로의 회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에반겔리온의 인류 보완이고, 해탈이기도 합니다.

사도들이 끊임없이 네르프 본부에 쇄도하는 것도 모두다 근원으로 회귀하기 위한 움직임이었지요.

에반겔리온에서 밝히는 사도와 인간의 관계는 '같은 부모에게서 나온, 다른 가능성을 가진 생명체'였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모두 회귀하기 위해서(임팩트를 위해서) 네르프 본부의 아담(이미 작게 태아의 상태로 축소돼 있지요)과 리리스와 접촉하려 합니다.

네르프와 제레의 목적은, 다른 사도들이 먼저 접촉해서 임팩트를 일으키는 것을 막고, 자신들이 임팩트를 일으키는 것이었죠.

그러나 신지의 선택은 회귀가 아닌 독립이었습니다.

신지의 자위신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많았습니다만, 사실은 극장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했던 장면이라는 지적이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지의 주위에는 여러가지 스타일의 여자가 나옵니다.

어머니의 의미로서의 레이가 있고, 보호자 내지 선생님의 의미로서의 미사토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스카가 있죠.

아스카의 경우 TV판에서는 신지의 성적 반려로서의 상징이 무척 부족합니다.

서로 싸우는 일도 많고, 아스카가 적대의식을 나타내는데다가 아스카의 정신은 카지에게 가 있습니다.

게다가 신지와 레이와의 관계가 자주 등장하면서 아스카와 신지를 남녀로서의 파트너로 인식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작가는 자위신에서 두사람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넘어갑니다.

"두사람의 관계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상징하고, 성적인 파트너를 상징한다. 앞으로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다른 해석은 금지한다!"는 게 신지의 자위신이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신지의 선택은 생명의 연원을 떠나 스스로 서는 것.

인류란 것이 신의 품에서 독립해서 혼자 서는 것. 그리고 아이가 부모에게 독립해서 스스로 배우자를 택하고 함께 서는 것입니다.

신지가 선택한 사랑은 신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이고,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라 애인으로서의 사랑입니다.

레이는 모성입니다.

유이의 분신으로서의 레이는 남편인 겐도를 버리고 결국 아들인 신지를 택합니다.

사실 레이가 겐도에게 한 마지막 대사 "나는 당신의 장난감이 아니야"는 여성의 독립선언과도 같지요.

물론 결국 그게 모성으로만 연결되는가는 좀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겠습니다만.

가장 마지막에 아스카와 신지가 나란히 누워있는 장면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해석이 많습니다만, 신지의 꿈이었다든지 아니면 두사람이 아담과 이브가 된다든지 하는 해석은 다소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친절하게도, 가이낙스측은 양산형 에바의 잔해를 보여주면서 ‘완전한 꿈은 아니었다’를 확인해 주고 있고, 거대한 레이의 몸(아마도 어머니->생명의 모체->생명의 연원->신)에서 하나로 모였던 여러 사람의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은 그들이 다시 자아를 찾았음을 얘기합니다.

신지와 아스카의 마지막 신도 역시 하나의 상징이지요.

유심히 보신 분이라면 아스카가 누가 치료해줬을 리도 없는데 붕대를 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스카가 붕대를 감은 부위는 레이가 첫회에서 붕대를 감은 부위와 일치합니다.

(눈의 좌우가 다른 것은 일부러 그랬을까 아니면 단순한 실수일까?)

사실 아스카는 양산형 시리즈에 당할 때 그 부위를 다치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머니(레이->연원->신)에서 배우자(아스카->개체->인간)로 간 것을 상징한 것이 아스카의 붕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레이가 임팩트의 모체가 됐기 때문에 레이(유이)의 아들인 신지가 연원(모체)로 돌아갈지의 마지막 선택권을 가지게 된 것이고 '겐도의 아들에 달리게'된 것은 그런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 아스카가 신지를 좋아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선택은 신지이고 신지의 시점이 되는 것이죠.

자신의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신지는 후회할지 모릅니다.

결국은 마지막 해탈의 순간에 다시한번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갖고 상처입히는 세계로 돌아오니까요.

아스카에 대해 신지가 품었던 열등감.. 이라고까지는 몰라도 신지는 자신에게 댁댁거리는 아스카에 대해 공격적인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장판에서도 꿈속에서 아스카의 목을 조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다시 현실에서 서로를 상처입히는 세계로, 나와 남이 다른 세계로 돌아왔다는 상징이, 아스카에 대한 ‘공격’입니다.

(뭐 좀 더 머리를 돌려보면 그게 성적인 행위의 상징이 아닌가도 생각합니다만, 그냥 짐작 수준이므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역시 다시한번 서로를 상처입히는, 존재 자체로 부담이 되는 현실 세계를 상징하는 단어로 에반겔리온은 끝을 맺지요.

아스카의 ‘기모치 와루이’.

극장판에 관객석을 비추는 실사장면이 나온다고 해서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간단한 상징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사가 "이곳은 꿈"이라고 합니다.

이 상징은 단순히 오타쿠들에게 현실을 상기시키려고 한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우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호접지몽(胡蝶之夢)'의 얘기입니다.

내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꾸는 꿈이 나인 것인지 모른다는 얘기지요.


신지와 레이의 꿈속에서는 인간세상이 등장합니다.

작가의 꿈속에서, 에반겔리온의 세계가 이뤄졌듯이 우리의 세상은 신지가 꾸고 있는 꿈의 일부인지도 모릅니다.

에바의 서드 임팩트를 통해 모든 사람의 마음의 벽인 AT필드는 사라지고, 인간은 인간사이에서 벌어지는 아픔도, 고통도 모두 벗어난 세계로 이끌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의 벽이 없어지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개인의 정신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세계이지요.

이런 통합의 마지막 과정에서 신지(혹은 레이)가 꾸는 꿈의 세상인 극장안의 현실세계와도 그 벽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물론 극장안의 사람까지 AT필드가 무너지고 녹아들어갔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AT필드가 무너지면서 가게 되는 세계는 통합의 세계입니다.

비단 작품안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작품 밖의 현실세계와도 통합하려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것이 통합되는, 그래서 완전한 것으로 향하는 것이 인류보완계획인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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