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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퍼노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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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12.31
    청의 발호

여진족은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숙신(肅愼), 읍루,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직(女直)..
시대마다 부른 이름을 달랐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만주에서 살았다.
중국과 조선에 활, 말, 화살, 모피 등을 조공으로 바쳤고 그 댓가로 필요한 것을 얻어 살아갔다.
한 때는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를 대조영과 같이 건국하여 역사서에 그 이름을 알리기도 했고, 금(金)이라는 나라를 세워 중원을 위협한 적도 있었지만, 징기스칸(成吉思汗)의 원(元)에 정복당하여 겨우 부족들을 유지한채 만주에 물러나 있었다.

명(明)이 원을 패퇴시키자 일부 세력이 만주땅까지 도망갔기에, 명군은 만주까지 이들을 쫓아갔고 이윽고 멀리 흑룡강(黑龍江) 하류까지 이르렀다. 명의 성조 영락제(永樂帝)는 만주의 평안을 위해 힘을 쏟았는데, 누르칸(奴兒干) 도사(都司)라는 역소(役所)를 마련하고 그 밑에 184위(衛)를 설치하여 여진족장을 장(長)으로 삼아 관직을 주었다.
또한 농경지가 있는 요동(遼東)땅에는 한인(漢人)들이 살도록 하고 개원(開原), 무순(撫順), 관전(寬甸) 동쪽에 담을 둘러쌓아 이를 경계로 여진족이 서쪽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하였다.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쫓겨난 여진족은 예전에 그들의 조상들처럼 다시 수렵생활을 하며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명이 대이정책(對夷政策)을 실시하자 고생은 더욱 심화되었다.
1424년 영락제가 사망하자 오이라토[瓦刺], 타타르가 다시 일어나 중원의 북쪽에 압력을 가했고 1449년 오이라트의 습격으로 명황제 영종이 포로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土木의 變) 이를 틈타 여진은 이를 계기로 명의 구속에서 벗어나려 한다.
겨우 번성의 기회를 잡은 여진은 재기를 노렸지만, 곧 명-조선연합군에 정벌당하게 되고 다시 복속을 맹세하나 그것도 잠시. 북노(北虜) 타타르의 아루탄(俺答)이 명의 북변을 휩쓸고 다니자 명은 대부분의 병력을 북변으로 보내었고, 더군다나 남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여 군사를 남으로도 돌리니 요동의 병력이 비게 되었다. 이를 놓치지 않은 여진의 족장인 왕고, 왕태(王台), 왕올당(王兀堂)은 요동의 담을 넘어 요동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요동에는 명장 이성량(李成梁)이 버티고 있어 겨우 여진을 막아내게 된다.(이성량의 아들이 바로 이여송(李如松)이다.)

잠시 이 때의 여진족에 대해 살펴보자면, 누르하치가 태어나기 전에는 만주가 크게 해서여진(海西女眞), 건주여진(建州女眞), 야인여진(野人女眞)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가장 유서가 깊은 부족은 명 184위 중 하나인 건주위(建州衛)에서 시작된 건주여진으로, 건주위는 점점 영역을 넓혀 좌우양위(左右兩衛)를 세우게 된다.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시조는 당대의 족장 멘게치무르(猛哥帖木兒), 그 동생 한챠는 건주우위(建州右衛)를 만들었다. 건주우위는 형의 부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기에 창설초기부터 순탄치 않았다. 건주우위는 건주여진, 해서여진, 명나라 국경이 모두 접하는 위치에 있었고, 명나라의 압박과 해서여진의 신장으로 독립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능력이 매우 출중한 왕고라는 인물이 건주여진을 이끌기 시작했다.

고구려성의 폐허가 아직도 남아 있는 만주의 요충지 무순(撫順).
그곳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곳에는 혼하(渾河) 상류의 지류 가운데 하나인 소자하(蘇子河)가 흐르고 있고 그 소자하의 상류인 헤토아라에 근거지를 둔 건주우위. 그곳에는 닌쿠타베이제(六祖)라 불리는 6형제가 있었고, 그 중 넷째는 교챤가(覺昌安)라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교챤가에게는 5형제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넷째는 타쿠시(塔克世)라 불리웠던 자였고 그에게는 누르하치라는 출중한 아들이 있었다.
(육조부터 청조의 성씨(姓氏)인 아이신교로(愛新覺羅)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아이신교로(愛新覺羅 : 애신각라) 라는 성씨의 신라 근원설을 주장하는 이가 간혹 있는데, 이 성씨가 음차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공식 기록에도 이와 관련된 문헌이 없음을 주지해야 하며, 애신각라의 신라 근원설이 근래 들어서 유행된 우리 나라 한문음역에 의한 추측성임을 강하게 주장한다;;

요동 침범으로 처형된 왕고에게는 아타이(阿台)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명은 아타이가 명을 배반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성량을 요동으로 파견한다.
명군은 아타이를 추격하게 되고 누르하치가 25살 되던 해(1583년), 아타이를 구레(古勒)성에 몰아놓게 된다. 사실 교챤가는 명과 아타이의 싸움에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아타이가 자신의 손주사위였기에 그를 구하기 위해 타쿠시를 데리고 구레성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명군은 아무런 죄가 없는 교챤가와 타쿠시를 모두 살해.(교챤가의 장남인 리돈은 용장으로 부족민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왜 교챤가가 장남을 두고 타쿠시를 데려갔는지는 아직 궁금증으로 남고 있다.)
이성량은 오인하여 죽인 것이라며 관직을 주어 누르하치를 위로했지만, 누르하치는 교챤가의 부하인 니칸와이란(尼堪外蘭)이 계략을 꾸민 배후일 것이라는 생각에 명군에 니칸와이란의 신병을 요청한다. 하지만 명군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신병 인도를 거부하고, 누르하치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니칸와이란을 처단한다.

사실 누르하치는 어렸을 때 계모 슬하에서 자랐으며, 계모와는 사이가 안 좋아서 19살 때 가출한 적도 있었다. 게다가 누르하치의 아버지인 타쿠시는 교챤가의 장자도 아니기에 누르하치가 씨족을 장악하는 것에 반대하는 친족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도박을 감행하여 명과 싸워 니칸와이란을 참수함으로서 조부의 원수를 갚았다는 명분을 내걸었고, 이를 이용해 부족민의 신망을 얻고 족장이 되어 실권을 장악한다.

누르하치가 조부의 원수를 갚고 족장이 되었을 무렵 건주여진의 스쿠스후호(蘇克索護河)부, 후네헤(渾河)부, 완양(完顔)부, 돈고(棟鄂)부, 제첸(哲陳)부, 장백산(長白山)의 노인(訥殷)부, 압록강(鴨綠江)부, 야인여진의 동해의 오슈우(窩集)부, 와루카(瓦爾喀)부, 쿠루카(庫爾喀)부, 해서여진(후룬(呼倫))의 우라(烏拉)부, 하다(哈達)부, 에호(葉赫)부, 호이하(輝發)부가 서로 왕을 자칭하며 싸우고 죽이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재빨리 부족의 기틀을 잡아 건주여진의 5개부를 통합했다, 다음에 장백산의 2개부와 야인여진 3개부를 복속시킨다. 송화강 유역이라는 지리적 이점과 명과의 교역을 통해 문화적 경제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해서여진, 즉 후룬은 누르하치의 발호에 위기감을 느끼고 4개부를 단합한다. 또한 타타르 동부의 부족들과 장백산의 일부를 끌여들여 9부 연합군을 조직하고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을 공략한다.
이것이 바로 샤르흐 결전과 더불어 누르하치 2대 위기 중 하나인 혼하 격전이다. 이 때는 누르하치가 35세 되던 해로, 누르하치는 혼하 부근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9부 연합군을 성공적으로 파쇄한다.
한편, 후룬은 대패하여 에호부의 부치베이레는 전사하고 우라부의 부지양타이베이레는 포로로 붙잡힌다. 누르하치는 아예 후룬을 자기 손 안에 넣을 수도 있었지만, 그의 기본 통치 개념인 "은혜와 위엄으로 시행한다."를 적용하여 부지양타이베이레를 귀국시키고, 에호부에 새로운 왕을 임명하여 후룬을 재건시켰다.
누르하치는 갑자기 부족을 멸망시켜 부족민의 원망을 사기보다는 때를 기다려 적들이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들기까지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그는 호이하부, 하다부, 우라부를 차례대로 멸망시키고 우수한 인재는 자신의 신하로 삼았다.

이리하여 만주를 거의 통일한 누르하치. 하지만 마지막 남은 에호부만이 남았으나 에호부의 뒤에는 명나라가 버티고 있었다.
이쯤의 여진족은 그 이전 삶의 방식이었던 수렵과 채집보다는 농경에 힘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명나라를 조금씩 자극하기 시작했다. 명은 누르하치에게 요동으로 넘어오지 말 것을 설득하고, 만약을 대비해 병력을 모아두기 시작했다.(1613)
이렇게 누르하치는 족장이 된 후 수십년 동안 만주 통일과 여진족의 건국 초석에 힘을 기울여 1616년, 중신들의 권유를 받아 왕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이라 했다. 이 때가 누르하치가 58세 되던 해였다.(나중에 누르하치의 아들 혼타이지(태종)가 "청(淸)"이라고 바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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