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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재하지만, 다능하지 않은.
by 슈퍼노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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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노비의 일거리/박물관'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08.12.30
    대전차 자주포 Nashorn (1943)
  2. 2008.12.01
    F-5 All-story "형식"
  3. 2008.11.25
    F-5 All-story "개발"
  4. 2008.07.04
    F-14 All-story "형식"
  5. 2008.07.03
    일본 항공자위대의 전술교리
  6. 2008.07.02
    F-14 All-story "날개"
  7. 2008.06.29
    F-14 All-story "엔진"
  8. 2008.06.08
    F-14 All-story "개발"
  9. 2008.06.06
    F-14 in Action(1990s ~ 2006)
  10. 2008.06.03
    F-14 in Action(1970s ~ 80s)
 

<Nashorn은 코뿔소라는 뜻이다>


Nashorn

1941년 6월, 독일군의 소련침공작전은 그럭저럭 성공하는듯 보였다.
하지만 독일육군의 주력이었던 3.7cm와 5cm 대전차포가 T-34와 KV-1을 만나 쓸모없는 쇳덩어리가 되면서 주춤하게 되고 이에 독일군은 급하게 신형 7.5cm포를 배치하여 4호 전차와 3호 돌격포의 주포를 강화하고, 마더 시리지를 비롯한 대전차 자주포를 실전에 투입시킨다.
한편, 1942년 독일군은 신형차량 개발과정에서 쓰다 남은 차체에 10.5cm 포와 12.8cm 포를 탑재한 대전차 자주포를 시험삼아 실전에 투입시켰는데 의외로 뛰어난 위력을 실감한다. 하지만 프로토타입이라 대량생산된건 아니기에 독일군은 신형 대전차 자주포의 능력과 필요성을 가늠하게 되었고 당시 크루프사에서 개발정이었던 71구경 8.8cm 대전차포 Pak43에 주목한다.(이 포는 나중에 티이거 II와 야크트 판터의 주포로 탑재된다.)


한편 독일군은 10.5cm 자주유탄포용으로 시험제작된 3호 전차와 4호 전차의 차체를 결합한 섀시를 기반으로 하여 15cm 유탄포 sFH18을 탑재시킨 자주포 Hummel에 사용하려던 참이었고, 이를 1943년 5월부터 200대 제조할 예정이었다.(3/4호 전차간 공통점이 많아 부품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독일군의 의지) 대전차 자주포 차체로 활용했던 1 ~ 3호 전차에는 7.5cm 급 이상의 포를 탑재할 수 없어 새로운 차체를 물색하던 독일군은 앞으로 생산될 Hummel 차체에 Pak43을 얹어 시험해보기로 하고, 1942년 10월 시험기가 생산된다. 시험기에 감탄한 히틀러는 Hummel 생산분 200대 중 100대에 Pak43을 탑재할 것을 명령한다.
Pak43을 탑재한 100대의 Hummel은 Hornisse(말벌)이라고 명명되었지만, 곤충의 이름은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한다는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Nashorn으로 변경되었다.


<동계위장된 Nashorn>

Nashorn 생산을 위해 포는 크루프, 차체는 알케트사가 맡아 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예정된 제작수량은 1943년 5월 12일까지 총 500대였다.
그러나 Pak43의 제작은 계속 늦어졌고, 다급해진 크루프사는 Pak43 포가에 Pak41 포신과 폐쇄장치를 얹은 Pak43/41의 차량탑재형인 Pak43/1을 만들어 Nashorn에 장착한다.(1943년초) 1943년 3월 1일에까지 Pak43/41은 23문이 겨우 만들어졌고 독일군의 하계공세 시점에는 85대, 1943년말에는 345대, 1945년 5월 9일(독일군 항복)까지는 총 494대 제작되었다. 하지만 Nashorn의 위력은 매우 뛰어나서 독일의 모든 전선에 투입되었고, 특히 소련군 전차를 1발 격파할 수 있었던건 구축전차 Ferdinand와 대전차 자주포 Nashorn 밖에 없었다.


 


Hummel

Hummel은 Nashorn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차체의 기본구조는 Nashorn과 동일하다. 다만 탑재하는 포가 다른데, 원래 Hummel은 10.5cm 유탄포를 탑재하여 경야전 자주유탄포로 쓸 예정이었으나 개발 도중에 15cm 포로 변경되었다.
(구경이 커지게 되어 Hummel의 탄약휴대량은 18발로 감소되었고, 이 때문에 포신없는 Hummel을 개조한 전용탄약운반차가 Hummel을 따라다니게 된다.)

<이것은 Hummel의 프로토타입>






<참고로, Hummel은 Bubble Bee.. 왕벌이라는 뜻이다>
AND
 
F-5A Freedom Fighter
시리즈 최초의 양산형인 F-5A는 시험제작기 YF-5A 3대와 강도시험기 XF-5A 1대를 포함하여 모두 621대가 생산되었다.
해외 수출용으로 개발되었기에 대부분이 MAP(Military Assistance Program : 무상원조계획)용으로 1972년 6월까지 각국에 배치되었다.
기본적으로 당초 계획한 N-156F를 구체화하면서 기체 각 부분의 강도를 강화하여, 주익 아래 하드 포인트를 좌우측에 각 2군데씩 마련하였다. 또한 주익 끝에는 AIM-9 사이드와인더 전용 발사대인 Aero 3B 런쳐 또는 50 갤런짜리 탱크를 장착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사용 국가의 희망에 따라 공중급유용 프로브를 장착했다.
F-5A의 시작 1, 2호기는 애프터 버너가 없는 GE의 YJ85-1 엔진이 장착되었으며, 시작 3호기부터는 애프터 버너가 있는 J85-GE-5를 장착했다.(추후에 시작 1, 2호기도 같은 엔진으로 변경) 양산형부터는 추력이 향상된 J85-GE13을 탑재하게 되었다.
F-5A의 기수는 뾰족하고 검은색으로 도장을 하여 마치 소형 레이더가 탑재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공기역학적 관점에서 모양을 그렇게 한 것일뿐 레이더는 없다. 원래는 수색 레이더와 관성항법장치를 조합한 휴즈의 TARAN(Tactical Attack and Navigator)를 장착하려 했으나 F-5A를 구입하려는 국가들이 저렴한 가격과 높은 정비성을 요구했기에 장착하지 않았고 사격조준장치도 단순 광학 조준기를 사용했다.
게다가 전자장비도 최대한 단순화하여 통신장비는 UHF 라디오, ADF, TACAN 정도만 집어넣어 50년대 수준과 비슷하게 했다. 새로운 전투기이면서도 장비의 수준은 그대로였지만, 이런 단순함 때문에 오히려 기체의 신뢰성과 정비성이 향상되어 F-5가 성공하게 된 장점이 되었다.

 
F-5B Freedom Fighter
이 기체는 F-5A의 파일럿 훈련을 위한 복좌형으로 동체는 T-38을 사용했다. 반면에 주익과 공기흡입구는 F-5A를 사용하여 복좌형인데도 F-5A보다 동체 길이가 약 26cm 짧다.
연료탑재량이 작아 항속거리가 짧아진 것을 제외하면 F-5A와 기본적인 성능은 동일하다. 그래서 T-38과는 달리 훈련과 전투 임무에 모두 사용이 가능하기에 경제적인 이유로 별도의 훈련기 운행이 어려운 국가에서 운용하기에 최적이었다.
 

F-5C Scoshi Tiger
미공군이 F-5A의 성능 테스트를 위해 스코시 타이거라는 특무부대를 편성하여 베트남전에 투입하였다. 이 부대에서 쓰였던 기체는 F-5A를 개조한 것으로 공중급유 프로브 장착, 엔진 아래 부분에 장갑판 설치, 5개의 파일런을 긴급투하가 가능하게 하였다. 미공군은 테스트 후에 이를 엔진 개량과 함께 C형으로 계획했지만 비용 문제로 취소되었다.


F-5D

F-5C의 복좌형. 단지 계획서상에만 존재한다.

 
F-5E/F Tiger II

MiG-21의 등장으로 F-5A/B를 대체할 해외공여용 전투기 개발이 요구되었으며 그 결과 나온 것이 기존의 전투기를 원형으로 개발된 F-5E이다.
F-5A의 엔진을 교체, 연료탱크의 대형화, 동체 재설계, 수색 레이더 장비 등의 개선을 통하여 기존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전투기가 되었다.
F-5F는 F-5E의 복좌형이다.

 

KF-5E/F 제공호
대한항공이 국내에서 조립한 F-5. 레이더 및 조종 기부에 대한 개선이 이루어졌으며 채프/플레어를 장착했다.


CF-5A/D(CF-116)

캐나테어사가 네덜란드형 F-5를 양산하여 캐나다 공군에 인도한 기체.

 
T-38 Talon

F-5의 모체가 되는 고등훈련기.

 
RF-5A/E Tigereye
RF-5A는 F-5A의 페어링에 카메라를 장착하여 정찰용으로 사용한 기체. 중소국가에서 저예산 정찰기로 운용되었다. RF-5E는 F-5E에 카메라를 장착한 것으로 RF-5A에 비해 더 많은 종류의 센서 탑재가 가능하다.


F-20 Tigershark (F-5G)
중소국가와 제3세계 국가에 수출용으로, F-16에 대항하기 위해 개발된 F-5E의 업그레이드 기종. 기본적으로 동체는 F-5E와 비슷하지만, 단발 엔진이기에 기체 내부의 설계를 완전히 재설계했다. 기본성능 및 유지보수면에서는  타이거샤크가 유리했지만, 시험기의 잦은 추락사고로 인해 1986년 개발사업이 종료되었다.
AND

<P-61 Black Window>

<F-89 Scorpoion>


Northrop社는 F-5 시리즈와 YF-17 코브라 전투기를 개발한 경력 때문에 경전투기 메이커로 잘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2차 대전 중에 제작한 쌍발 대형 야간 전투기인 P-61 블랙 위도우와 2차 대전 후 방공기인 F-89 스콜피온과 같은 대형 전투기를 주로 제작한 메이커였다.
그런데 미공군이 야심적으로 추진한 센츄리 시리즈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은 에드거 슈미트를 1952년에 부사장으로 스카웃하면서부터 Northrop社는 경전투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에드거 슈미트는 이미 2차 대전 당시 가장 우수한 전투기로 인정받은 P-51 무스탕과 미국 최초의 후퇴익 제트 전투기인 F-86 세이버를 개발한 엔지니어로서 당시 유행하는 대형 전투기의 흐름에 대해 되돌아보고, 소형 - 경량이면서 더 강한 추진의 엔진을 조합시키는 데에 착안하고 있었다.
특히 6.25 당시 자신이 개발한 세이버가 MiG-15에 고전하는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은 에드거 슈미트는 경량 전투기를 무시하는 기존 메이커와 결별하고 자신의 경량 전투기 개념을 실현하고자 Northrop社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커다란 전자장비를 탑재한 고성능 대형 전투기에 밀려 외면당하던 경량 전투기는 수십 년이 지나면서 YF-16과 YF-17의 출현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각인되기 시작했다.


<YF-17 Cobra>

Northrop社가 벤처 비즈니스로 개발한 N-102 Fang은 외형이나 설계 사상이 F-5와는 전혀 다른 기체로 센추리 시리즈가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경량 전투기의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는 기체였다. Fang은 수평미익이 있는 델타익의 요격기로, 엔진을 동체 아래에 탑재하고 가변식 공기흡입구를 기수의 아래에 배치한 특이한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주익은 고익배치를 하고 주익의 앞에는 코니컬 캠버를 주었다. 엔진은 GE의 J79 또는 프랫 앤 휘트니의 J57, 라이트의 J65 등이 후보로 올랐으며, 20mm 벌컨을 비롯하여 8종류의 무장을 탑재할 예정이었다.
1954년에 목업이 완성되어 수직미익에 52-2777이라는 미공군 시리얼 넘버를 넣었지만 사실 이 번호는 KC-97L이 사용한 번호였다. 한편 전환훈련용 복좌형도 제안 되었는데, 길이 12.85m인 단좌형의 동체를 13.56m로 연장하여 후방석을 신설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고성능을 추구한 경량 전투기인 N-102는 불행히 같은 시기에 등장한 록히드의 F-104 Starfighter에 밀려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는 미사일 만능주의가 우세하던 시절이어서 높은 기동성의 제트 전투기 공중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미사일 한 방이 모든 것을 끝낸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N-102의 개념을 미공군은 이해하지 못했고 개발계획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물론 마하2를 넘는 제트 전투기가 공중전을 안할꺼라는 예상을 벗어나 베트남전에서 F-4는 미그기에게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Fang을 단념한 Northrop社는 눈을 해외로 돌려 NATO, SEATO(동남아조약기구), 중동국가가 보유하고 있던 1세대 제트 전투기를 대체할 새로운 전투기에 대해 검토를 시작하였다. Northrop社는 기술진을 세계 각국에 파견하여 데이터를 수집하였고 알맞은 성능에 가격이 저렴하며, 취급이 용이하고, 신뢰성이 높고, 짧은 활주로에서도 이착륙이 가능한 전투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세계 각국은 미공군이 개발 중인 센추리 시리즈와 전혀 다른 성격의 전투기를 원하고 있었고, 노후화된 제1세대 전투기를 보유 중이던 나라들은 신기종으로 교체를 희망하고 있었으나 고가의 센추리 시리즈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착안한 Northrop社는 1955년대 초부터 새로운 성격의 경량전투기 개발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N-102기의 구조를 변경시킨 N-156 계획이 시작되었고 이와 동시에 미공군은 기존의 T-33 고등훈련기를 대체할 음속비행이 가능한 차기 제트 훈련기 소요를 발표하였다.
Northrop社는 우선 고등훈련기 사업을 위해 N-156 계획을 고등훈련기쪽으로 방향을 수정하였고 N-156의 조종석을 2인승으로 개조한 N-156T를 미공군에 제시하였다. 이 기종은 비용 대 효과면에서 인정받아 1956년 7월에 채택되어 1959년에 첫 양산형 비행에 성공하였다. 이것이 바로 T-38 Talon이다.
미공군의 고등훈련기 사업에 T-38이 선정된 Northrop社으로서는 자금 걱정 없이 해외수출용 전투기 계획인 N-156F에 다시 여력을 쏟아부었다. N-156F는 1959년 5월 30일에 1호기를 공개하였으며 7월에는 첫 비행에 성공하였다. 당시 N-156F에 장착된 엔진은 후연기가 없는 YJ85-GE-1(추력 955kg)이었고 2호기는 후연기가 장착된 J85-GE-5(추력 1,745KG)를 장착하여 초음속 성능을 확보했으나 3호기를 제작하던 도중에는 미공군은 효용성 및 F-104를 의식해 평가시험을 중단하기도 했다.
1960년대가 되어 미국은 동맹국과 우방국의 공군력 강화를 위해 이들 국가에 대한 군용기 원조 프로그램을 재실시하기로 시작했는데, 이 프로그램에는 Northrop社의 N-156F가 선정되어 N-156F는 다시 빛을 발하게 된다. 초음속 성능의 N-156F로 소련의 MiG-19를 대응할 수 있고, 동맹국과 우방국에 초음속 전투기를 공급하면서도 항공기 탑재 레이더 기술의 유출은 방지할 수 있는 최적의 기종이었던 것이다.(Northrop社는 화력제어 레이더를 N-156F에 장착하려 했지만, N-156F의 기수가 작아서 탑재할 수 없었음) 이런 이유로 선정된 N-156F는 곧바로 양산형 체제로 진행되었고, 1963년 5월에 YF-5A 1호기(N-156F 3호기) 첫 비행에 성공했고 10월에는 F-5A가 첫 비행에 성공한다.


<P-61 Black Wind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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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F-14A
YF-14A는 F-14A의 프로토 타입으로 2기의 목업이 제작된 후에 만들어졌다. 1970년 12월 21일 최초로 비행했으며 1970년까지 모두 12기가 제작되었다. 이들은 모두 다른 종류의 테스트를 위해 사용되었으며 157986호기는 뒤에 F401 엔진을 장비한 F-14B의 프로토 타입이다. YF-14A는 외관상 기수에 테스트용 프로브가 달려있는게 특징이며 2호기(147981)는 스핀 시험용 소형 카나드가 기수 앞부분에 붙어 있는 등 각 기체가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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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4A
F-14A는 최초의 양산형으로 처음에는 A형을 생산하고 이어서 엔진을 강화한 B형, 전자전비를 강화한 C형을 생산할 예정이었지만 B형과 C형의 개발이 좌절되는 바람에 A형은 1985년까지 545기가 생산되었다. 하지만 같은 A형이라도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뒤에 생산된 블록의 개수가 이미 생산된 기체들의 개수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실전부대에서 사용하는 F-14A는 거의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각 블록별로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은 비버테일, 에어브레이크, 기수 하면의 센서들, 벌컨용 배기구 등이며, 특히 초기형에서 기수하부에 장비되었던 IRTS는 TCS로 불리는 AAX-1 텔레비전 카메라로 교체되어 1983년부터 포인트 머그에서 시험을 거친 뒤 133기가 조달되어 F-14A에 장비되었다.
각 블록별로 진화를 살펴보면, 1971 회계연도분의 블록 65부터는 소폭 개량형인 TF30-PW-412A 엔진이 장착되었고 1972 회계연도의 블록 70부터는 글러브 페어링 상부에 펜스가 추가되었다. 비버 테일과 에어 브레이크는 1973 회계연도의 블록 75부터 개량되었고 1974 회계년도의 블록 85부터는 AN/ARC-159 UHF 라디오가 도입되었다. 1975 회계연도의 블록 90부터는 기수 끝부분에 AOA 프로브가, 1976 회계연도의 블록 95부터는 TF30-PW-414 엔진이 장착되었다.
1977 회계연도의 블록 100에서는 플랩과 슬래트가 개량되고 연료계통 및 AWG-9 시스템의 개량으로 신뢰성이 향상되었다. 1979 회계연도의 블록 110 후기부터는 비버 테일과 주익 글러브 하면에 AN/ALQ-126 안테나가 추가되었고, 1982 회계연도의 블록 125에서는 TCS가 장착되었다.
F-14A 중 4기는 F-14D의 프로토 타입으로 전용되었고, 블록 85와 110의 기체 중 18기는 F-14D(R)로, 블록 115와 블록 120의 기체 중 32기는 F-14A+로 개조되었다.

JF-14A
기체번호 158613번 F-14A. 테스트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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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4A-GR (이란공군)
F-14A가 수출된 유일한 국가가 바로 이란으로서, 이란에 인도된 기체는 블록 90에 해당하는 블록 05형 30기, 블록 10형 32기, 블록 15형 18기의 모두 80기이며, 테스트 목적으로 그루먼사에 남은 1기를 제외하고, 총 79기가 1976년 1월 27일부터 이란공군에 인도되었다. 애초에 이란은 F-14와 함께 F-15, F/A-18L(지상형) 등도 검토하였으나 1973년 파리 에어쇼에서 F-14에 감탄한 팔레비왕이 F-14의 구입을 결정하였다.
F-14A-GR은 F-14A 블록 90과 같은 기종이지만, 당시 최첨단 기술인 ECCM 장비는 제거되고, 레이더 장비는 다운그레이드된 상태로 출고되었다. 이란 혁명으로 미국의 지원이 끊겨 F-14A는 전투보다는 간이 조기경보기 형태로 운용되었다.(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최소 7기 격추당함.)

RF-14
TARPS 장착 기종이다. F/A-18 대신 행동반경이 큰 F-14A를 전술정찰기로 사용한 것을 RF-14로 명명했으나  F-14D의 전 기종이 TARPS를 장착하여 큰 의미가 없어진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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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4A+ (F-14B)
애초에 F-14B에 장착될 엔진으로, GE의 GE1/10 엔진과 프랫 & 휘트니의 JTF22가 경합을 벌여 결국 JTF22가 F401-PW-400으로 명명되어 157986번 F-14B 프로토 타입에 장착된다. 하지만, F401 엔진의 결과가 예상외로 저조하여 B형 양산을 포기하고 A형의 생산을 계속하게 된다. 이후 1979년부터 TF-30 엔진을 대체할 수 있는 엔진 개발이 추진되었고 F-14A의 7호기를 이용하여 신형 엔진인 F101-DFE 엔진의 실험기가 만들어졌다. 이 실험기는 F-14B 슈퍼 톰캣이라 불리게 되었고, 각종 실험을 실시하였으나 미해군은 곧 폐기시킨다. 그리고 1984년 그루먼사는 GE의 F-110-GE-400 엔진으로 다시 테스트를 실시하였는데 실험결과가 기대치 이상으로 근접하자 F-14A+라는 명칭으로 생산이 시작되었고, 1991년 5월 1일부터 F-14A+는 F-14B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F-14C
F-14C는 톰캣 3단계의 마지막 단계로 전자장비를 강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높은 가격부담과 B형의 실패로 인해 계획은 취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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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4D
D형은 원래 계획에는 없었던 것이었으나 B형과 C형의 개발취소 이후 1984년에 발표되었다. 당시 개발 중이었던 F-14A+의 애비오닉스를 완전히 개량한 것으로 그 기반은 F-14B 슈퍼 톰캣에서 시작되었다. 원래 장착되어 있던 AN/AWG-9 레이더 대신 AN/APG-71 레이더를 장착하여 디지털화 및 대지공격 능력을 꾀했고, 신형 IRST와 TCS, AYK-14, AN/ALR-67 레이더 경보 시스템, AN/ASN-139 관성항법 장치, 마틴 베이커의 SJU-17A/V 이젝션 시트 등이 도입되었다.
F-14D의 프로토 타입은 A형 4기를 개수하여 만들어졌고 최초비행은 F-14B 슈퍼 톰캣이 1986년 9월 29일, 애비오닉스를 갱신한 기체가 1987년 11월 23일에 비행하였다. 그리고 1990년 3월 23일에 양산형이 롤 아웃되었다.
F-14D의 생산은 당초 127기가 계획되었으나 예산문제로 1988 ~ 1990 회계연도분의 37기만 생산되었고 기존의 A형을 개수하여 1990 ~ 1991 회계연도분으로 18기를 추가했다. 이것이 바로 F-14D(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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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F-14D
F-14D의 프로토 타입으로 F-14A를 개수했다. 총 4기이다.

F/A-14D Strike Cat
톰캣의 F-15화를 추구하는 프로그램. A-6E 인트루더의 퇴역에 따른 해군의 장거리 침투공격능력의 상실문제로 미해군이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노스롭 그루먼사는 새로운 계획을 제시하였다. F-14D의 능력에 AN/ALE-50 견인 디코이, FLIR, 나이트 비전 고글 등이 추가로 도입하고 F-15E의 APG-71 공대지 타격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F-15E와 같은 수준의 공격력을 보유하는 것이다.
당초에는 1995년부터 4단계에 걸쳐 250기의 톰캣에 실시하며, 4단계까지 업그레이드 완료 후에는 JDAM, JSOW의 운용능력까지 부여되려 했으나 총 예산이 약 92억 달러나 되어 포기.

F-14T
F-14T는 팬텀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무장을 스패로우 + 사이드 와인더만 장착하며 전자장비도 다운그레이드 된 것. 미해군의 승인거절.

F-14X
피닉스만 8발 장착하며, 역시 레이더 장비는 다운그레이드. 미해군의 생산 및 이스라엘 수출 승인거절.

F-14 Quick Strike
인트루더 퇴역 공백을 보충하기 위해 나온 기체. 하푼이나 매버릭도 장착가능하도록 설계되었지만, F/A-18 호넷 프로그램 등장으로 승인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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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cat 21
기존의 톰캣을 개조하는 프로그램으로, 스텔스성을 상당 부분 도입하여 F-22와 같은 능력을 끌어내려 했다. 엔진은 F110-GE-129로 교체하여 초음속 순항비행을 구현하고, 전자 장비도 대부분 업그레이드 하는 계획으로 비용 대 효과면에서 뛰어난 계획이었다.

Attack Tomcat 21
톰캣 21을 개량한 어택 톰캣 21은 A-12 어벤져에 적용될 레이더와 전자장비를 그대로 도입한 것으로, 둘 다 채택 승인은 얻지 못하였다.

ASF-14
외형상은 F-14의 개념을 따르고 있으나 사실상 새로운 기체. ATF(Advanced Tactical Fighter)와 ATA(Advanced Tactical Attack Aircraft)의 장점을 살려 만드는 기체로, 사실 새로 개발하는 기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산과 톰캣 21보다 떨어지는 효율성 때문에 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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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무라 츠토무
(예비역 육상자위대 소장 / 日本軍事硏究 1997년 10월호)

정찰, 근접지원, 제공권, 수송, 전략폭격…. 공군의 임무는 여러 분야에 걸쳐있으나 강한 기체를 보유하고 있는 공군이 결코 강한 공군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시대를 개척하는 새로운 전술교리를 가져야만 비로소 강한 공군이 되는 것이다. 독일은 전격전을 고안해냈다. 항공자위대는 미국의 흉내를 그만 두고 일본의 하늘에 적합한 자신만의 교리를 명확히 하라!
 
만들기 쉬운병기
레이건 대통령 시절의 이야기이다.
"드디어 미국이 본격적인 우주 전쟁 시대의 군비(軍備)에 돌입했습니다. 우주 병기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죠. 이제는 일본이 국방력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시대가 아닙니다.”
일본의 군사전문가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 하나는 정치론, 법률론으로부터 전략론을 이끌어 내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병기의 성능으로부터 전략을 논하는 사람들이다. 전술로부터 논하는 사람들이 없다. 이 두 타입의 전략가들은 미국의 우주전쟁론에 매우 놀랐다. 레이건은 소련뿐 아니라 일본까지도 깜짝 놀라게 한 것이다. 중국도 놀랐을지 모르나 개혁개방노선이라는 경제우선정책을 가속화하였다. 그러나 유럽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역사에 기초를 두고 레이건의 전략을 관망했다. 그들은 우주전쟁 준비의 경쟁에 휩쓸리지 않고 계속해서 재래병기의 연구개발에 힘을 쏟았다.

"우주병기의 개발보다 어려운 것은 대기권 비행기의 개량이다. 그 중에서도 어려운 것은 헬리콥터인데 왜냐하면 공기라는 저항이 있고 비나 바람이 있으며 온도차가 균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면 배를 설계하는 쪽은 더 어려워. 그리고 잠수함은 훨씬 더 어렵고. 물의 저항을 극복하는 병기가 공기의 저항을 극복하는 병기보다 개발하기 곤란하다고 한다면 육상의 병기는 더 어려워. 육상의 병기 중에서도 땅속에 잠복하는 병기는 훨씬 더 어렵지. 뭔가 이상한 논의야. 그렇다면 땅을 달리는 전차보다 하늘을 나는 전차쪽이 만들기 쉽다는 얘기야? 중력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이 이론은 반대가 되는데? 하늘을 나는 전차나 군함이 가능하다면 육상을 달리는 전차의 중량은 그 몇 배에 달하는, 대단한 것이 될 수 있어."

"우주전함 야마토의 크기는 해상전함 야마토의 몇분의 일이라는 얘긴가?"

이 단순한 논의가 항공기 본성의 틀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운용의 틀도 정하고 있다. 중력을 극복할 수 있었다면 항공기의 설계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항공기는 가솔린 엔진의 출현에 의해 탄생했다. 항공기의 역사는 확실히 엔진의 발달과 함께 진행해 왔다고 얘기해도 좋다.
 

정찰과 근접항공지원  
전쟁에 항공기를 사용한다는 개념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시도되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1908년, 임시군용 기구 연구회가 발족되어 1910년 도쿠가와 쿠우헤 대위가 지금의 요요기공원 자리에 있었던 연병장에서 쌍엽기인 앙리 팔망(Henri Farman)을 타고 최초로 비행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항공기는 전쟁의 최초부터 참가했다. 그 당시의 임무는 정찰, 경계, 포병의 착탄 관측이었다. 오늘날의 조종사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 항공부대의 임무이나 기본 사명의 하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국본토에 대해 제펠린(Zeppelin) 비행선이 본격적으로 폭격을 시작한 것은 1915년 1월로 여덟 차례에 걸쳐 계속 되었다. 이 폭격은 심리적 작전이어서 육상 작전과는 어떠한 연계도 없었다. 최초로 대규모 항공폭격이 지상작전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행해진 것은 1918년 9월, 연합군의 산뭴공세였다. 미 공군 대령 William Mitchell이 지휘하는 600기가 대성공을 거두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항공기의 유용성에 세계의 군대가 주목했다. 그 후 이탈리아는 1934년, 에티오피아 전쟁에 서항공폭격과 지상부대에 대한 근접항공지원(폭격이나 총격에 의해 육상부대 전방의 적을 공격하는 것)을 실시, 큰 효과를 거두었다. 1936년부터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의 군사이론 실험장이 되어 항공 전력의 유용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항공전력이 실제로 실력을 발휘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전격전이있다. 구데리안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왜 돌파가 좌절되었는가를 연구하고 전차를 핵심으로 하는 돌파 작전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이 신속한 돌파에 보조를 맞출 수 있는 포병이 없었다. 이에 따라 구데리안은 포병 대신에 융커스 Ju-87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를 사용하였다. 이 전술교리에 의해 독일군은 1939∼40년, 폴란드, 노르웨이, 프란다스, 프랑스를 순식간에 석권하였다. 이와 같이 독일군은 항공전력의 운용에 있어 탁월함을 보였으나 실제적인 의미에서의 항공전력의 신교리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독일군의 항공운용은 기본적으로 지상부대의 전투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육상부대가 주인공이고 공군은 보조자였다. 지상부대의 작전에 직접 협력하여 화력지원하는 '근접항공지원'은 항공부대의 기본적인 사명이 되었다. 미 / 영 공군은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근접항공지원을 육군의 지휘하에 넣지 않고 육군과 협동하는 신 전술교리로 개발하였다. 이러한 개발은 1942년, 아프리카 군단을 지원하고 있던 독일공군을 항공전력의 집중력과 유연성으로 기습할 수 있게 하였다.


제공권 다툼  
당시, 영국은 공군운용에 대해 걸음마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신 전술교리의 개발에 있어서는 독일보다 앞서 나갔다. 확실히 군사력의 진보는 전술교리의 개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역사적인 실례였다. 그 성과는 '영국전투' 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영국 공군에 의해 개발되고 미 공군에 의해 다듬어진 공군의 전술교리는 '제공권', '전략항공공격(전략폭격과 항공저지)', '근접항공지원'의 개념이었다.

제공권의 획득 또는 항공우세는 전략항공공격과 근접항공지원의 전제일 뿐만 아니라 방어작전에 있어서도 긴요한 요소라고 인식되어졌다. '항공우세의 획득' 또는 적어도 '적에게 효과적인 항공우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은 전략 폭격을 저지하고 국가의 경제 및 산업력을 지키며 육/해군의 전력을 보전하기 위한 불가결한 전투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제공권의 귀추는 군인 뿐만 아니라 일반시민의 사기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제공권의 획득은 단순히 적 항공기를 공중에서 격파하는 '공중전'뿐만 아니라 '적 기지의 파괴 및 점령'을 이루어야만 가능하다. 여기에서 공군은 해군과 같이 '기지를 어떻게 전략적으로 전개하고 어떻게 전술적으로 이용할 것 인가'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렇게 공군은 육군, 해군과 함께 중요한 군사적 지위를 획득했던 것이다. 전투를 계속하면서 공중전의 성과가 매우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기지를 파괴하여도 바로 수리, 회복할 수 있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활주로에 폭탄이 한 발 떨어지는 것을 'one cut'라고 하는데 one cut 정도의 피해는 몇 시간 후면 회복되어진다. 3일 이상 사용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three cut 이상의 폭격이 필요하다.

이렇게 며칠 동안 비행장의 사용이 불가능하다면 어느 정도 항공기가 건재하더라도 항공기의 사용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지상에 있는 항공기는 쉽게 항공공격의 목표가 되므로 한 개 비행장을 사용하는 항공기의 수는 제한을 받게 된다. 한 개 비행장을 기지로 이용하는 항공기의 기수는 최대 50기, 가능하면 25기 이하가 바람직스럽다. 기지에 있는 항공기는 방공호에 분산되어 숨어있어야 한다. 방공호는 공군기지의 또 다른 조건이다. 이 원칙은 오늘날에도 통용된다. 항공자위대가 보유하는 비행장의 수는 작전기수에 비해 너무 적다.

오늘날에는 탄약, 미사일, 그 외의 장비들을 항공기에 탑재하는데 특수한 공구들을 필요로 한다. 유사에 있어 민간 비행장을 사용할 경우 이와 같은 공구나 방공호가 없고 탄약 등이 집적되어 있지 않으면 기지라고 말할 수 없다. 더구나 방공능력도 없다. 항공자위대가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의 하나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기지의 조건을 정비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기지의 방공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기지방공용 대공화기'가 탄생했다. 대공화기가 탄생하자 제공권을 얻기 위해 기지를 공격할 때 먼저 기지방공 시스템을 격파 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둘째로 아군 기지를 어떻게 배치하고 적 기지를 어떻게 점령하는가 하는 것이 전략적, 작전적 과제가 되었다. 단순히 적 기지를 격파하는 것만으로는 제공권의 지속적 획득 및 유지가 불가능하다. 적의 기지회복을 끊임없이 감시 하고 때때로 기지공격을 반복해야만 한다. 기지가 이에 대응하여 공중전에 의한 기지방공을 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기지방공은 공중전과 대공화기에 의한 조합이 되어 이 분야에 있어서도 전술교리의 개발이 요구되었다.

대전(大戰)이 시작되자 곧 대공레이다가 개발되었다. 제공권의 쟁탈은 레이다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영국전투는 레이다에 의한 영국공군의 승리였다. 당초 레이다의 운용은 과학자들의 병기 기술론으로부터 전술 교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들은 즉시 전사(戰史)를 파헤쳐 싸우는 방식의 경향을 파악하여 전술교리를 변경하였다. 이것이 작전연구의 시작이었으며 '전술교리는 전사에서 배운다.'라는 원칙의 확인이었다. 제공권을 다투는 싸움이 공중전과 기지공격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자 이 두가지에는 커다란 차이가 생겼다. 공중전은 탑재하고 있는 화력을 다 사용할 때까지 전장에 남아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전장에 오래 남아있는 쪽이 유리하다. 자연히 기지로부터 전장까지의 거리가 짧은 쪽이 유리하다. 한편, 기지공격은 탑재 탄약과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시간만 있으면 된다. 재빨리 대지공격을하고 전장으로 부터 빨리 이탈하여 귀환하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항공기에는 pay load라는 전투력의 제한이 있다. pay load는 연료와 탄약 등의 탑재중량총계를 의미한다. 멀리 있는 기지를 공격하려면 탑재탄약량은 적어진다. 만약 공격에 필요한 충분한 화력을 탑재할 수 있다면 기지 공격은 out range 공격이 바람직하다. 권투를 예로 들면 공중전은 접근전을 펼치는 dog fighter이고 기지공격을 리치를 이용한 out boxing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 기지를 빼앗는다. '적 기지의 점령'이다. 적 기지의 점령은 알렉산더 대왕의 원칙처럼 육군에 의한 작전이 필요 하다. 이와 같이 육군의 임무에 해군기지, 공군기지의 점령이라는 임무가 더해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볼 때 어떻게 기지를 전개하고 쟁탈했는가에 초점을 맞춰보면 항공전략의 시점으로부터 교훈을 얻게 된다.

오늘날 국제군사정세를 분석하는데 있어 최초의 평가항목으로서 논의되어지는 것이 해/공군기지의 배치이다. 예를 들어 대만해협의 긴장을 분석할 때, 대만에 있는 비행장과 해안 건녀편 福健省에 있는 중국 공군기지의 배치를 가장 먼저 평가하게 된다. 중국 공군의 보유기가 아무리 많더라도 대만해협에서 작전할 수 있는 항공기의 수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

제공권 쟁탈 다툼은 공군 자신을 위한 전투로 육상부대나 해상부대에 대한 직접적인 효과는 없다. 전술적으로 보면 육군의 포병끼리 서로 공격하는 대포병전과 동일한 것이다. 또한 제공권 쟁탈은 전력을 경주하여 실시하여야 하는 전투이므로 육군의 적 항공기지 점령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육군이나 해군 전투 모두 공군의 제공권 쟁탈의 귀추를 한가로이 기다리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육 / 해군의 공군에 대한 요구와 공군 자신의 요구가 일치하지 않게 되었고 공군과 육 / 해군은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해군은 자기 나름의 공군을 갖게 되었고 육군은 공군의 독립을 반대하는 원인을 만들었다. 이것이 역사이다.

 
전략폭격
제1차 세계대전은 군비를 정비한 국가(무장국가)의 전쟁이 아니라 군비와 무기생산력을 지닌 국가(전시국가의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냈다. 전쟁이 '전선의 전사'와 '총후의 전사'에 의해 전개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1921년 이탈리아의 도웨 대령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이탈리아 국방정책과 이탈리아 군의 추태를 비판하고 군법회의에 의해 투옥되었다. 그 후 명예가 회복되어 군에 복귀한 도웨 대령은 대장을 역임한 후 퇴역하여 '제공권' 이라는 책을 지었다.(오늘날의 일본에서는 현역 자위관이 정부의 국방정책, 자위대의 군사이론을 비판할 경우 즉시 문제가 되어 퇴직을 강요받게 된다. 게다가 퇴직한 자위관은 그 주장을 책으로 써내지도 않는다) 도웨는 이 책에서 공군의 독립과 전략폭격의 주요성을 설명하여 세계의 공군이론을 리드했다. 공군의 중요한 사명은 '총후의 전사를 공격하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처음으로 공습을 지휘한 미첼도 전략공군의 창설을 주장 했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개전초에는 많은 항공기를 잃었으나 그들이 창조한 공군 전술교리에 의거 영국전투에서 독일 공업지대에 대한 공세적 전략폭격을 계속하였다. 당시에는 전략폭격을 도와 줄 장거리 전투기가 없었기 때문에 폭격기의 손실을 피하기 위해 야간에 폭격을 실시하였다. 이에 맞서 독일은 즉각 방공전투력을 일으켜 세워 영국 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한편 영국의 야간폭격은 매우 부정확해 독일의 많은 일반시민들이 사망하였다. 미국의 아놀드 장군은 도웨나 미첼의 이론을 강력히 실행하고 공군을 독립시켰다. 미 공군도 당초에는 전략폭격을 도울 수 있는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략폭격기 자체에 강력한 대공전투능력을 장착하였다. '하늘의 요새' B-17의 탄생이었다.

하늘의 요새를 보유한 미국의 전략폭격은 정확한 파괴에 중점을 두어 주간에 공격을 실시하였다. 영국과 미국 공군이 주야에 걸쳐 실시한 전략폭격으로 인해 독일의 공업력은 급속히 저하되었다. 전략푝격은 해군에 의한 '봉쇄'보다 적 생산력에 대한 효과가 직접적이었다. 성공의 열쇠는 '양'이었다. 미 공군은 곧바로 폭격기와 동행할 수 있는 전투기를 개발하였다. 그리고 더욱 강력한 폭격기인 B-24, B-29를 개발했다. 이에 의해 미 / 영 폭격기의 손해는 급속히 감소하였다. 미 공군은 독일에 대한 전략폭격을 다듬어서 대닐 전략폭격을 실시하였다. 일본은 곧 공업생산력을 잃었고 전략폭격 이론의 궁극이 된 '히로시마 / 나가사키 원폭 투하' 를 맞이하게 되었다. 1927년 육군은 87식 중폭격기, 경폭격기를 국산화하였고, 1932년에는 88식 정찰기인 아이쿠니 경폭격기를 만주전장에 투입하였다. 熱河작전에서는 87식 폭격기가 참가했으며 日航(만주항공)의 민간기가 수송기로서 참전 했다. 1933년 오랜기간의 연구가 결실을 맺어 '소년비행병'이 탄생하였고 1938년 육군항공사관학교가 독립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끝내 공군이 독립하지 못했다. 1936년 육군은 항공전력의 증강을 계획하고 97식 번호를 붙인 전투기, 폭격기, 정찰기를 개발하였다. 일본도 전략폭격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1939년 支那사변에서 重, 蘭洲, 成都를 폭격기 약 30∼100기로 장기간(11∼20일간)에 걸쳐 폭격했다. 그러나 '총후의 전사'를 공격하는 일본의 전략폭격은 여기까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상대는 미국과 유럽이었기 때문에 폭격은 불가능했다. 그에 따라 전략적 폭격은 적국의 총후를 폭격하는 것이 아니라 전장에 침임해 오는 적 전력을 저지 / 제한하거나 약화시키는 목적으로 전환되었다. 이와 같은 의미의 폭격은 유럽과 아프리카 전장에서도 행해졌다. '항공저지폭격'이라는 항공운용개념이었다.

 
공수작전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작전과 지중해작전(1940년)은 대규모 '공정작전'의 시작이었다. 노르망디상륙작전에서는 미군 이 작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태평양의 빌마전장과 중국 장개석 군을 지원하는 작전을 통해 대규모 공수 작전이 위력을 발휘하였고 새로운 사명이 부가되었다. '공수병참'이다.
 

냉전시대와 오늘날의 공군
항공전력과 공군운용의 전술교리가 엔진의 발달에 따라 변천해 왔음은 최초에 서술한 바와 같다. 제2차 세계대전 말이 되자 독일은 제트가와 V-2 미사일에 의한 전략공격을 개발했으나 이미 전운은 기울어져 있었다. 열강들은 항공기의 제트화와 미사일 개발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전쟁에서는 제트기가 큰 활약을 하였다.
초기의 제트기들은 레시프로 엔진기에 비해 항속거리가 짧았다. 레시프로기는 고고도에서의 비행성능이 떨어진 반면 공기밀도가 높은 저공에서는 프로펠러의 추진효율이 좋았졌을 뿐만 아니라 적 레이다에 발견되지도 않았으며 저공접근에도 용이했다. 이에 반해, 제트기는 저공에서의 큰 공기저항으로 인해 연료의 소비가 컸다. 제트기는 비행속도를 증가시킬 경우, 급속히 연료소비가 증가한다. 그 증가계수는 레시프로기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제트 전투기는 공식 최대속도로 비행할 경우 공식 전투항속거리가 전반이하로 떨어진다.
한편 제트엔진의 추력은 끝없이 발달하여 항공기의 속도와 운반력을 증대시켰다. 다른 한편으론 미사일 기술이 발달했다. 또 전자기술이 발달하여 대 레이다 작전이 중요해졌으며. 이 결과 제2차 세계대전에 정착된 공군의 사명은 개정되기 시작했다. 그 사명을 정리해보면'항공정찰', '항공경계', '포병의 사탄 관측', '항공우세의 취득', '근접항공지원', '전략폭격', '항공저지', '공정작전', '공수병참', '대전자전' 등을 들 수 있다. 신속성과 오랜시간의 재공(在空)이요구되는 항공경계와 포병의 사탄관측은 제트기에는 적당하지 않아 헬리콥터가 담당하게 되었고 각각 육군과 해병에게 기능을 반환하였다. 원래 이 기능은 공군이 독립했어도 육/해군이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항공정찰은 오늘날에도 공군의 중요한 사명으로 전략 / 전술 정찰기는 공군의 필수장비가 되었고 전략폭격은 핵 폭격에 주안점을 두게 되었다. 물론 운반탄량이 거대하기 때문에 재래폭탄에 의한 폭격도 유용하나 대공미사일의 발달로 인해 1기의 폭격손해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B-29의 상용폭탄 탑재량(3톤)은 제트전투폭격기에 의해서도 탑재될 수 있게 되었다. 이 결과 핵전략을 필요로 하는 미국을 제외한 열강들은 폭격기의 수를 급속히 감소시켰다. 항공저지도 손해극소화와 폭격효율이라는 관점에서 폭격기보다는 전투폭격기가 더 뛰어났다.

공정작전은 더욱 큰 문제를 갖고 있었다. 육군의 전투력이 기계화 되어감에 따라 강하한 육군병사의 구보, 경무장으로는 싸울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공정대원의 강하시에는 저속의 비행속도가 요구되어 제트기는 비행속도의 범위를 늘려야만 한다. 저속비행과 고속비행이 가능한 공정용 수송기의 설계는 어려운 문제를 포함한다. 이에 더해 대공미사일의 발달로 이러한 종류의 항공기들은 취약성이 증대하였으며 한발의 피탄에 의한 희생이 너무 컸다. 열강, 특히 소련과 미국은 중량물자 투하의 공정작전 개발에 노력했으나 투하할 지형의 선택에 제한을 받아 사실상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의 과제이다. 아마 헬리콥터를 사용하는 육군과 해병대에 사명을 반환하게 될 것 같다.

항공병참에 있어서는 제트전투기의 전투항속거리를 늘리는 것이 긴요한 과제가 되어 공중급유기가 개발되었다. 또한 제트 수송기의 운반능력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어 비행장의 가치를 전략적 / 전술적으로 긴요지형의 지위에 끌어 올렸다. 제2차 세계대전시 육군에게 요구한 '공군기지의 점령', '공군기지의 방어' 임무는 앞으로의 커다란 전술교리과제이다. 동시에 적은 반드시 해상으로부터 상륙하여 침공할 필요가 없고 아군의 양호한 공군기지를 점령하여 그곳을 작전기지로 사용, 대규모 지상작전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도시국가에 방공군
이상과 같은 변혁들을 정리해보면 공군의 전술교리는 미사일의 발달로 인해 어려움을 맞이하고있다. 공군운용의 발달은 정찰로부터 시작되었고 항공화력의 투사를 정점으로 항공수송, 전자전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그 전제로서 항공우세 쟁탈이라는 공군의 독자적 운용이 탄생하였다.또한 가장 중요한 기초적 사항으로 '항공기지의 취득, 적 항공기지의 파괴/점령' 및 '기지방공'을 들수있다. 현재의 공군 운용중점은 '항공우세', '근접항공지원', '전략폭격?항공저지폭격', '항공정찰', '항공병참', '전자전'으로 좁혀져 있다. '공정작전'은 헬리콥터에게 그 사명을 양보하고 있다. 전략 / 전술 미사일의 발달로 인해 '기지방공 / 전략요지방공'은 공군의 중요한 사명이 되었다. 이중 '기지방공'은 공군의 사명으로 남을 전망이나 '전략요지의 방공'은 공군의 사명에서 제외시켜 오로지 이 임무만을 담당하는 '방공군'에게 육 / 해 / 공군, 해병대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필요할 듯 하다. 미사일은 기지방공, 요지방공의 유효한 수단이다. 또한 순항미사일과 같이 전략폭격이나 항공저지 폭격을 대신할 가능성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발의 미사일이 옮길 수 있는 탄두의 탄약량은 핵무기가 아닌 한 매우 제한을 받는다. 게다가 멀리 있는 미사일 기지에서 발사하는경우, 정확도가 좋더라도 전황(戰況)이 요구하는 전기(戰機)에 맞춰 공격하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다. 비행에 시간이 걸리기 대문이다. 그보다는 항공기에 의한 폭격의 경우가 탄량이 훨씬 많고 고속이기 때문에 파괴력이 크다. 결국 미사일의 운용은 미사일을 항공기에 탑재하는 쪽이 훨씬 합리적이다. 또한 유연성과 신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항공기의 가치는 없어질 수 없다.
도시 등의 요지방공을 위해 미사일 요격용 미사일을 탑재한 항공기를 개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일본의 기술이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자위대의 현실정을 보면 우선 요지 방공군이 없다. 이 상태로는 도시주민들이 전쟁을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도시국가가 전쟁에 취약한 것은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나타난 현상이 아니며.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 부터 문제가 되어왔다. 다행히 일본은 섬나라이다. 도시에 대한 위협의 주체는 전략폭격과 미사일 공격이다. 방공 전투시스템을 구축한다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관계없이 평화헌법을 이유로 전쟁에 대비해오지 않았던 정치가들의 책임은 매우 크다. 군용비행장의 수도 적고 전략정찰기도 없다. 전략폭격기까지는 필요치 않을지도 모르나 전략폭격이나 항공저지폭격도 정치가들은 금지하고 있다. 難島방위에 필요한 해병대도 없다. 적 항공기지의 점령 등은 꿈 같은 얘기이다. 항공자위대를 보는 한 일본은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라의 국방을 미국에 의존하는 속국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은 과연 미국을 태양으로 생각하는 해바라기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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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제공전투능력을 가질 수 있게 한 가변익(VG Wing)은 이착륙 및 상승, 순항시에는 후퇴각을 줄여 익폭하중을 낮추고 양항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초음속 비행시에는 후퇴각을 크게 하여 충격파의 저항을 줄이거나 돌풍하중을 낮출 수 있어 초저공 비행시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 따라서 초저공 침투임무를 수행하는 공격기나 폭격기는 모두 가변익을 채택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기체로 토네이도나 B-1B 랜서 등이 있다.
가변익 기술은 F-111에서 처음으로 실용화되었으며 개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2차 대전 당시 독일에서 제작된 Messerchmitt Me P.1101까지 이어진다. 세계 최초의 가변익 전투기인 P.1101은 주익의 후퇴각을 출격임무의 성격에 맞게 지상에서 변경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고속 비행이 요구되는 고공에서의 전투임무에는 큰 후퇴각을, 큰 속도가 요구되지 않는 저공에서의 지상공격 임무에는 작은 후퇴각을 선택하여 출격전에 미리 맞추어 놓을 수 있었으나 비행 중에도 후퇴각을 맘대로 조절할 수 있는 지금의 가변익 전투기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독일공군의 가변익 연구는 종전과 함께 미공군으로 넘어가게 되고 P.1101을 베이스로 벨 X-5 연구기가 개발되어 1951년 6월 20일 첫 비행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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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 제작한 가변익 실험기 벨 X-5. 비행 중 20 ~ 60도까지 날개각도를 조절할 수 있다.

X-5의 개발에는 그루먼사도 협력하였으며 그루먼사는 당시 개발 중인 XF10F-1 재규어 함상 전투기의 이착함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가변익을 채택하여 1952년 5월 19일에 첫 비행을 하였다. 가변익을 장착한 기체는 후퇴각을 변화시킬 경우 주익의 양력중심이 앞뒤로 이동하기 때문에 대치방향의 안정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동체중심선 근처에 가변익의 회전축을 앞뒤로 슬라이딩하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방식은 안정성 확보에는 유리하지만 기계장치가 복잡하고 중량이 중가하는 단점이 있다. XF10F-1의 경우도 중량초과 및 조종성 문제로 개발의 중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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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F10F-1 재규어. 미군 최초의 가변익 전투기

가변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8년부터 NASA에서 중량이 증가하는 가변익의 회전축 슬라이드 기구를 폐지하고 기구를 단순화하는 연구를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회전축의 위치, 주익의 애스펙트비, 테이퍼비를 바꾸어 여러가지 종류를 컴퓨터로 분석하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1959년 NASA의 연구진은 새로운 가변익 기술을 발견하게 되었다. NASA의 가변익 방식은 고정된 회전축을 동체중심선과 멀리 떨어진 기체 바깥쪽으로 옮기고 양력 중심을 주익 뿌리 부분에 가깝게하여 이동을 최소화하며 주익의 테이퍼비를 크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 연구결과에 따라 F-111로 가변익이 실용화되었다. F-111의 개발을 담당한 제너럴 다이나믹스는 개발파트너로 가변익 개발에 경험이 있는 그루먼사를 선정하였으며 그루먼사는 해군형 F-111B의 개발을 맡았으나 중량증가문제로 실패하고 경험을 F-14로 이어나간다. 가변익 기술에 있어 그루먼사는 X-5, XF10F-1, F-111, F-14 등의 개발작업을 가장 많은 기술을 축적하고 있으며 영국, 독일, 이탈리아의 합작품 토네이도 개발시에도 그루먼사의 기술제휴가 있었기에 성공하였다.
F-14는 F-111에 이은 NASA 방식의 가변익을 채택하였으나 그루먼사는 모델303을 구상할 때 고정 후퇴익과 가변익을 모두 검토하였다. 그 뒤 미해군의 VFX 요구조건을 만족시키려면 고정후퇴익의 경우 기체의 대형화와 중량증가의 문제점이 있어 결국 가변익기로 결론이 내려졌다. 또한 함상기의 경우 주익을 접어 공간을 절약해야 하기에 가변익을 채택할 경우 별도의 주익을 접는 장치가 필요 없다는 이점이 있다.
F-14에 장착된 가변익의 최대 특징은 제공전용으로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상승, 하강, 급선회 등이 요구되는 공중전에서 가변익이 주는 이점을 100% 발휘하기 위해 F-14의 파일럿은 가변익을 자동모드로 선택해 놓기만 하면 컴퓨터가 비행상황에 따라 자동으로 적당한 후퇴각을 선정해주며, 날개 또한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최적의 비행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또한 6G 기동 중에도 가변익 작동에 가능한 액튜에이터를 장착하고 있다. F-14의 가변익은 비행 중에 후퇴각이 20 ~ 68도까지 자유롭게 움직이며 항모상에서 격납될 때는 수동으로 최대 75도까지 후퇴시킬 수 있다. 비행 중의 후퇴각 변경은 CP-10661A Central Air Data Computer의 분석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F-14의 주익면적은 52.49㎡, 공중전시 익면하중은 440㎏/㎡로 통상의 전투기 평균치보다 약간 낮지만, 68도의 가변익과 평평한 동체부분에서 발생하는 양력이 41.16㎡ 발생하여 전체주익면적인 93.65㎡, 익면하중은 269㎏/㎡로 크게 낮아진다. 따라서 공중전시 기동이 여타 다른 전투기(F-15, F-16, F/A-18)보다 우수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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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뱃암즈 16호(1997년 1월) / 이장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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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4는 베트남전의 교훈에 따라 한쪽 엔진이 피탄되어도 다른 엔진으로 비행을 계속할 수 있게 엔진과 엔진사이를 멀리 떼어 놓은 배치를 하였다. 엔진이 2기일지라도 F-111이나 F-4처럼 같이 붙어 있으면 피탄시 나머지 엔진도 피해를 입을 우려가 있었다. 또한 F-111 개발시 얻은 경험에 따라, 보트테일 저항 감소와 함께 엔진 압축기 실속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공기흡입구에서 엔진까지 흡입덕트를 일직선으로 구성하기 위해 동체에서 떨어진 위치에 엔진 나셀을 쌍동형식으로 배치하였다. 2개의 엔진 나셀을 이어주는 평평한 동체 구조들은 전체적으로 양력을 발생시키는 구조를 하고 있어 동체는 저항만을 일으킨다는 종래의 상식을 깨고 있다. 이러한 동체형식은 소련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MiG-29 펄크럼, Su-27 플랭커에 채택되었다.
F-14A에 탑재된 프랫 & 휘트니 TF30 엔진은 A-6에 사용된 컴팩트형 터보제트 엔진인 J52에서 발전한 터보팬 엔진으로 민간형 엔진인 JT8D와 같은 계열 관계이다.
TF30은 TFX의 F-111용 엔진으로 선정되어 세계 최초의 전투기용 터보제트 엔진으로 양산화되었다. 미해군은 F-111B용으로 경량화 모델인 TF30-P-12를 채택할 예정이었으나 F-111B의 계획 중지로 무산되었고 VFX로 등장한 F-14A에 TF30-P-412를 적용하였다.(배기노즐 개량버전)
TF30은 개발초기에 애프터 버너 장착 터보팬 엔진 특유의 문제인 블로우 아웃과 압축기 실속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미해군은 F401 엔진을 탑재한 F-14B에 큰 기대를 걸었으나 예산문제로 포기하고 TF30을 장착한 F-14A를 오래도록 써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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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F30 엔진

그루먼사는 F-111B의 경험을 살려 F-14A의 공기흡입구를 2차원의 가변 면적형으로 채택하고 엔진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덕트를 만들어 공중전 기동시 급속한 스로틀 조작으로 인한 압축기 실속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였다.
프랫 & 휘트니사는 팬 블레이드를 개량한 TF30-P-414A로 엔진의 신뢰성을 개선하였으나 급격한 스로틀 조작 제한 문제는 해결을 못 본 상태였고, F-15와 F-16에 장착된 F100 엔진의 해군형인 F4 엔진은 F-14B에 테스트로만 끝났으며, F100 엔진의 팬을 확대하고 애프터 버너를 사용한 F401 엔진은 당시 신개발 최신 엔진이었지만 엔진 장기간 테스트의 제약으로 신뢰성에 확신이 없어 개발이 중지되었다.
프랫 & 휘트니의 엔진에 불신감이 늘어난 미해군은 F-14의 성능향상용 엔진으로 GE의 F101 DFE(Derivative Fighter Engine)을 선택하였다. 이 엔진은 B-1용으로 개발된 F101 엔진의 코어에 소형 팬을 장착한 엔진으로 프랫 & 휘트니의 터보팬 엔진시장에 도전하기 위해 GE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엔진이었다.
미공군도 프랫 & 휘트니사의 엔진에 대한 운용성 / 신뢰성 문제와 함께 독점방지를 위해 전투기용 터보 엔진의 이원화를 추진하여 GE의 F101 DFE를 사용하게 되었다.(이것이 바로 F110 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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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01 DFE 엔진

F101 DFE 엔진은 결국 F110-GE-400 엔진으로 TF30보다 추력이 10.5% 향상되고 신뢰도가 높아져 F-14B와 F-14D에 채택되었다.

- 컴뱃 암즈 16호(1997년 1월) / 이장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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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어느 한 전투기의 개발사를 살펴보면 노후된 구형 전투기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이 시작된 경우가 많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F-14 톰캣의 경우는 1950년대 이래 미해군이 꿈에도 그리던 전천후 함대방공 전투기 계획이 여러 차례 좌절 끝에 마침내 현실로 이루어진 특이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F-14는 1970년에 첫 비행을 시작한 이후 30년 동안 미해군의 주력 함상 전투기였다. 지금은 F/A-18E/F 호넷이 뒤를 이었지만 함대방공 및 제공전투 능력면에서 F-14는 아직도 최강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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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함대방공 전투기로 개발된 F6D 미사일리어. 실험기로 끝났지만 톰캣 개발에 밑바탕이 되었다.

개발이 중지된 미사일리어
1950년대말 미해군은 장거리 공대지 및 공대함 미사일을 장착한 소련의 장거리 폭격기의 크나큰 위험에 직면하고 있었다. 당시 한창 경쟁적으로 각국이 개발한 각종 미사일은 사정거리와 명중율면에서 점차 성능이 향상되어 수백킬로미터 밖에서도 미해군의 항모기동부대를 공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원거리에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회피하는 소련의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가능한한 적기를 함대에서 멀리 떨어진 발견 지점까지 마중나가서 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 확실하게 격추시켜야만 했다. 요즘이야 대함 미사일 격추가 용이하지만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어려운 일이었고, 미사일 발사모기가 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 미리 격추시킬 수 있도록 장거리 수색 및 추격, 공격 능력을 갖춘 함상 전투기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당시 미해군이 이처럼 항모기동부대의 방공력에 큰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SLBM을 갖춘 원자력 잠수함이 출현하기 이전까지 미해군의 항공모함은 핵폭격기를 적재하는 미국의 핵보복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공군의 핵폭탄폭판 탑재 장거리 폭격기와 더불어 항모는 매우 중요한 전략 수단이었으므로 소련에서도 유사시 이에 대항하여 수백기의 장거리 폭격기를 동원하여 수백발의 장거리 공대함 미사일로 미해군 항모기동부대를 초기에 격멸한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러한 대량 보복 공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어느 정도 일부 폭격기를 격추한다 해도 결국 항모기동부대는 무수한 미사일의 집중공격에 무력할 수 밖에 없다고 예상되었다.
이러한 소련의 전략에 맞서기 위해 장거리 수색 및 추적이 가능한 레이더와 장거리 AAM을 탑재할 수 있는 함대방공 전투기만이 해답이라는 결론에 따라 개발이 시작된 장거리 AAM은 1958년 12월에 벤딕스(Bendix) / 그루먼(Gruman)팀이 선정되어 XAAMN-10 이글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이글은 핵탄두를 장착한 최대속도 마하 3.4의 2단식 AAM으로 사정거리가 160km 이상이며 발사후 무선유도방식을 사용하며 중반 이후 미사일 내부에 탑재된 레이더를 사용하여 스스로 목표물을 찾아가는 액티브 레이더 호밍 방식을 사용하였다.
한편, 이글 미사일을 탑재한 전투기는 1959년 미해군에서 제시한 요구사양에 대해 6개의 메이커가 새로운 설계와 기존의 기체 개량 등의 안을 제시하였고 1960년 7월에 더글러스의 모델 D-9766이 선정되어 "F6D 미사일리어" 개발이 시작되었다.
미사일리어는 대형 레이더 안테나와 FCS(화기제어장치)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주익에 6발까지 이글 AAM을 탑재하고 비상시에는 동체 아래에 2발을 추가탑재할 수 있었다. 미사일리어는 완전무장 후 함대를 이탈하여 4~6시간 동안 초계 비행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항속력을 갖출 예정이었다. 최대속도가 마하 0.9밖에 안 되는 아음속 전투기에 미해군이 그토록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F-4 팬텀II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 장시간 비행능력 부족 - 를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개발되어 실전배치가 시작된 팬텀은 스패로 AAM로 장착 가능하고 속도도 마하 2 정도였지만 연료 소모가 많아 원거리 장시간 비행이 어려웠다. 따라서 초음속 비행 능력을 포기하고 장시간 공중에 머무를 수 있는 미사일리어 구상이 떠오른 것이다.
미사일리어는 원래 항속 성능을 높이기 위해 연료 소모가 적은 JTF10A 터보팬 엔진 2기를 장착하려 했다. 이 엔진은 세계 최초의 군용 터보팬 엔진으로 나중에 TF30-P-2란 형식번호로 F-111B와 F-14A에까지 탑재되었다.
미사일리어는 장시간 비행을 위해 조종사 2명과 미사일 유도 관제사 3명이 탑승하며 레이더 FCS는 웨스팅하우스의 APQ-18을 탑재할 예정이었다.(APQ-18은 16개 목표물을 추적하고 8개 목표물을 동시공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공격기 부대 호위, 대지 및 대함 공격 임무를 전혀 맡지 않고 함대방공 임무만을 수행하는 단일 목적 전투기라면 필요기수가 극히 적었을 뿐 아니라 비용대 효과면에서 나쁘기 때문에 찬반 논란이 일었다. 1961년 1월 케네디 정부가 들어서면서 취임한 로버트 S.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비용절감을 이유로 들어 그 해 4월에 미사일리어 개발계획과 이글 AAM 개발을 중지시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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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델 30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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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델 30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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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델 30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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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델 303F. 고정익이다.

TFX와 FADF
F6D 개발중지 이전에도 미해군은 제공전투가 가능한 새로운 함대방공 전투기 FADF(Fleet Air Defence Fighter) 구상을 세워놓고 있었다. FADF는 초음속 비행이 가능한 본격적인 전투기로 F6D도 FADF가 실현될 때까지의 임시적인 전투기에 불과했다.
한편 미공군은 F-105 선더치프의 후계를 찾고 있었는데 최대속도 마하 2.5에 핵폭탄 장착이 가능하고 대량의 무장탑재력 및 저고도 장거리 침투능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전투기에 대해 NASA는 새로 개발 중인 가변익을 미공군에 건의하여 1960년 6월 SOR103이란 명칭으로 개발 검토가 시작되었고 나중에 TFX(Tactical Fighter Experimental)란 명칭으로 구체화되었다. TFX는 임무의 성격상 전술 전투기라기 보다는 소규모 전략 폭격기에 가까운 존재였으며 미공군의 요구사항에 미루어 볼 때 기체의 크기가 대형화될 것이 충분히 예상되었다.
그러나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포드 자동차 부사장 출신답게 원가회계 개념을 지향하여 국방비 지출도 "비용 대 효과"라는 잣대를 들이대었고, 이에 따라 FADF와 TFX도 통합하여 개발비용을 절감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양 기종의 성격이 다른 관계로 공동개발이 불가능하다는 검토 결과에도 불구하고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최소 85% 공통성을 유지시켜 개발비를 절약하는 한편 3천기 이상의 양산을 목표로 공동 전투기 개발을 명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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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련공군의 Tu-95. F-14의 배치는 이 폭격기의 위협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결국 1961년 10월 1일 새로운 제안 요구서가 발행되었고, 1962년 11월 제너럴 다이나믹스 / 그루먼의 안이 채택되었다. 제너럴 다이나믹스는 공군형과 해군형의 공통점이 높았고, 그루먼은 전통적으로 함재기에 강했기 때문이었다. 공군형은 F-111A, 해군형은 F-111B란 명칭으로 각각 18기, 5기가 발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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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11B Aardvark

F-111B의 개발 실패
F-111A는 F6D에 탑재 예정이었던 TF30 엔진에 애프터 버너를 추가한 TF-30-P-1을 2기 장비한 병령 복좌의 대형 전투기였다. 또한 저공침투의 폭격 임무를 위해 지형 추적 레이더와 목표 포착 레이더를 장비하였고, 미공군의 항속력 /  탑재량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점차 대형화되어 갔다.
반면에 해군형 F-111B는 기본 형태는 F-111A와 같고 제너럴 다이나믹스가 개발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항모 운용을 위해 기수를 줄여 전장이 A형보다 짧았으며 주익은 착함시 저속비행 문제 해결을 위해 A형보다 커졌다. 또한 제공 및 함대방공 임무를 위해 휴즈의 AN/AWG-9 레이더와 AIM-54(XAAM-N-11) 피닉스 AAM을 장비하였다.
1965년 5월 8일 F-111B는 첫 비행을 실시하였으나 엔진의 실속 문제와 중량 초과 문제로 항모 운용 불가 판정을 받고 개발이 중지되었다. 특히 계획 중량이 약 22톤에서 약 28톤으로 수정되었음에도 실제 개발에는 약 31톤까지 늘어났다. 이에 설계 변경을 통해 중량 감소를 추진했으나 A형과의 공통성은 80%에서 29%로 급격히 낮아졌고 결국 무장과 연료를 완전탑재할시 총 중량이 최고 36톤까지 늘어나자 개발비 상승으로 해군은 개발을 중지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애초에 공군의 전폭기와 해군의 제공/함대 방공 전투기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구상은 무리였고, 그나마 해군이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명령에 따라 울며 겨자먹기로 개발하다보니 개발이 원활하게 될리 없었다. 결국 F-111 프로젝트는 미공군 단독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F-111B가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미해군으로서는 개발과정에서 가변익 기술, TF30 터보팬 엔진, AN/AWG-9 레이더, AIM-54 피닉스 AAM 개발기술을 고스란히 F-14 계획에 담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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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M-54 발사장면

VFX
F-111B가 중량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을 때 그루먼사는 F-111B가 실패할 것이라 예상하고 자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F-111B의 스펙을 그대로 담아낸 새로운 함상 전투기 모델 303이 그것이다. VFX-1이라 불린 전투기는 제공/함대 방공 임무 외에도 공격기 호위, 요격 임무까지 가능하게 설계되었다.
그루먼사는 1953년 모델 97이 보우트 F8U 크루세이더에, 1955년 모델 118이 맥도넬 더글라스의 F4H 팬텀II에 패배한 실패를 만회하고자 자체적으로 연구를 진행하였고 1967년 10월에 VFX-1(TF30 엔진)과 VFX-2(ATE 엔진) 계획안을 미해군에 제안하였다. 미해군은 F-111B의 시스템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도 크기가 F-4 수준으로 대폭 축소된 VFX에 큰 관심을 보였다.
미해군은 1967년 11월부터 1968년 3월까지 5개월 동안 F-111B와 VFX의 비교분석작업을 실시하였고 당시 미해군 주력기였던 F-4J 팬텀II보다 우수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특히, 베트남전을 교훈삼아 VFX의 우수한 기동성에 주목했다.
한편, 1967년 모스크바 에어쇼에 등장한 소련의 제3세대 전투기 MiG-23, 25, Su-15 등이 미공군/해군의 주력기인 F-4를 능가한다는 분석이 나오자 미해군은 VFX를 최대한 빨리 실현시키기를 희망하였고 F-111B의 개발중단과 함께 각 전투기 사업자에 VFX 요구 조건을 제시하였다.(미해군은 그루먼의 VFX 계획을 이미 선택한거나 다름없었지만 F-111B 개발을 중지시키면서까지 그루먼과의 수의 계약은 어려웠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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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4의 목업 모델 303E.

F-14의 개발
미해군의 제안 요구에 맥도넬 더글라스, 제너럴 다이나믹스, 그루먼, LTV, 노스아메리칸 등 5개사가 응모하였고, 비교 심사 결과 1969년 1월 그루먼의 모델 303E가 선정되어 F-14A라는 명칭으로 6기의 원형기 제작이 발주되었다.(추후 6기 추가 발주)
F-14A가 F6D와 F-111B를 거쳐 개발된 만큼 같은 성격을 이어받았음에도 발전된 모습으로, 보다 다목적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1950년대부터 미해군 항모 기동부대의 가장 큰 위협은 소련의 장거리미사일 폭격기였고, Tu-22 블라인더와 Tu-26 백파이어 같은 최신예 초음속 폭격기가 등장하면서 F6D 미사일리어 개발 당시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미사일리어 개발 당시에는 Tu-95 베어, Tu-16 배저가 주력기였지만 소련의 초음속 폭격기 등장으로 아음속 방공 함대 전투기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블라인더와 백파이어에 장착된 공대함 미사일 성능도 향상되어 미해군으로서는 소련의 공격 개시전에 선제공격을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어 레이더 FCS와 AAM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소련의 MiG 쇼크, 베트남전에서 MiG-17에 당한 아픈 기억들.. 이에 미해군은 F6D 개발 당시의 요구 사항을 한층 더 발전시켜 소련의 초음속 폭격기를 격추시킬 수 있게 초음속요격이 가능하고 소련의 신형 전투기 위험에 대처하고 이를 제압할 수 있는 기동성까지 요구하였다.
F-14의 개발 작업은 3단계로 나누어 시행되었다. 1단계는 F-111B의 기술을 이용하여 F-14A를 조기 개발하고 실전배치하며, 2단계에는 ATE 계획에  따라 F401-PW-400 엔진으로 교체하여 F-14B를 실전배치하고, 마지막 3단계에서는 ECCM 능력을 높인 경량 레이더 FCS를 장비한 F-14C를 배치한다는 계획이었다.(레이더 장비 개발이 기체 개발보다 기간이 더 많이 걸리기에..)
즉, F-14B는 엔진의 교환으로 기동성과 항속 능력을 향상시키고, F-14C는 무장 시스템을 강화시킨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실행하기에는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게 된다.
F-14A는 급속도로 추진되었고 1969년 3월에 기본설계가 완료되었고, 5월에 목업 심사가 실시되었다. 6월에는 원형기 제작이, 11월에는 지상에서의 가변익 테스트를 실시하였고, 개발 원형 1호기는 1970년 11월에 완성되어 12월 21일에 첫 비행을 실시하였다. 12월 30일 두번째 비행에서는 유압시스템의 고장으로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무리한 일정 단축에 따른 재사고를 막기 위해 개발일정을 다소 늦추게 된다.(1971년말까지 총 7기의 개발 원형 7기 비행 테스트)
F-14A의 개발은 F-111B에서부터 축적된 여러 개발작업 덕분에 개발기간이 상당히 단축될 수 있었다. 특히 티타늄 합금을 구조 재료로 사용하여 중량 절감에 성공했고, 수평안전판 외부에 카본 복합재료를 사용하여 F-111B보다 약 3톤 가량 가벼워졌다. 그 결과 항모 운용상의 문제도 해결되었다.
F-14A의 최초 양산형은 개발 원형기를 포함하여 F-14A 톰캣이라는 제식 명칭이 붙여졌으며 부대배치는 1972년부터 실시되었다. 원래 톰캣의 양산 계획에 따르면 개발원형기 12기를 포함해서 497기를 생산할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로트 I, II의 각 6기씩 개발 원형기에 이어 FY71로 로트 III(26기), FY72로 로트 IV(48기), FY73으로 로트 V(48기) 등 모두 122기를 양산할 예정이었다. 이들 122기는 고정가격으로 계약하였으나 개발비 증가와 인플레이션 때문에 그루먼사는 가격 인상을 요구했고, 로트 VI부터는 새로운 가격에 생산하기로 협의하였다.
F-14의 가격 인상에 따라 미해병대에 F-14를 배치하려던 계획은 취소되었고 미해군은 해결책으로 저가의 공격 전투기 계획인 VFAX를 추진하여 F/A-18을 개발하게 된다.

- 컴뱃암즈(1997년 1월 / 16호), 이장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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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가 되면서 냉전종식과 이지스함의 등장, 최신예 중거리 공대공 미사일 AIM-120의 등장 등 F-14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게 되는 사건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F-14 비행대의 상당수가 해산하게 되었고, 고가의 기체에 따른 높은 유지비용으로 F-14의 존재가치가 위협을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F/A-18의 무장탑재력 부족, A-6의 퇴역 등으로 F-14에 대지공격임무가 부여되기 시작하면서 F-14의 가치가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고, F-14B / F-14D 등의 개량형이 등장하면서 미해군의 멀티롤 전투기로 거듭나는 듯 했다.
하지만 계속 개발되는 전투기들과 비교하여 효율성이 현저히 떨어지게 되어 결국에는 2006년에 모두 퇴역했고, F-14의 임무를 F/A-18E/F가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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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M-54 피닉스 6발을 장착한 F-14. 엔진추력이 좋은 B형 이후의 기체는 피닉스를 6발까지 운용가능하나, 항모 착함시에는 중량문제로 인해 4발까지 장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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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프전 당시 쿠웨이트의 유전 상공을 비행하는 VF-114의 F-14A. 걸프전에서 F-14는 공대공 전투보다는 공격기 엄호 및 TARPS 정찰 임무를 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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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F-154 소속의 F-14A. 1997년부터 VF-154는 레이저 유도폭탄을 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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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k.20 로크아이를 장착한 VF-103의 F-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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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4에 달려 있는 TARPS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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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해군 시험평가비행대대 VX-9의 F-14B 163226/241. 이 비행대대는 시험평가를 위해 F-14A/B/D를 모두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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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4D는 항법전자장비를 완전개량해서 탑재했다. 그래서 Super Tomcat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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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4B와 F-14D에 장착된 F110-GE-400 터보팬 엔진.


- 자료출처 : 컴뱃암즈 16호(1998년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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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4A가 처음으로 실전배치된 1972년 이후 1980년대까지는 F-14의 가장 화려했던 시기로서, 이 시기의 F-14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최강의 함상 전투기였다. 또한 이 시기는 일시적으로 무려 30개의 F-14 비행대가 유지되기도 했으며, 기체도색도 컬러풀한 고시인성 마크를 상당부분 유지하고 있던 시기로서, 이 시기의 기체들은 항공기팬들 사이에 인기가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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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4의 마크 중 가장 화려하다고 할 수 있는 VF-1 소속의 F-14A. 걸프전쟁 무렵에도 이런 화려한 마크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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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F-1과 함께 컬러풀한 마킹의 대표적인 비행대인 VF-111 Sundowners 소속의 F-14A. 기수의 샤크 마우스와 수직미익의 일장기 침몰을 상징하는 마크가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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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4 전환훈련 비행대인 VF-101의 F-14A. 애초에는 대서양 함대와 태평양 함대 각기 별도의 전환훈련 비행대가 있었으나, 후에 통합되어 VF-101만이 남아 전환훈련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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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F-31 소속의 F-14A. Felix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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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F-213의 F-14A. 로우비지화 된 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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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4A는 AIM-54 피닉스 미사일을 6발까지 장착가능할 수 있지만, 실제 6발을 탑재하면 엔진 추력이 부족하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130km 이상의 사정거리를 낼 수 있는 피닉스의 위력은 독보적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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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이외에 유일하게 F-14를 보유하고 있는 이란공군. 호메이니의 혁명이 성공하면서 대부분의 이란 F-14 파일럿들은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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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F-301 소속의 F-14A. 원래는 예비역 비행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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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F-51 Screaming Eagles의 F-14A. 알래스카에서 소련공군의 Tu-95RC를 요격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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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F-32 소속 F-1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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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미핥기 마크로 유명한 VF-114 소속의 F-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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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SA의 각종 테스트에 사용되던 F-14A. 테스트를 위한 추가장비 장착을 위해 후방석에 사람이 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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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F-21 Freelancers 소속의 F-14A. 원래 인디펜던스함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F-14 비행대 축소로 인해 1996년 1월에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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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태평양 함대의 F-14 전환훈련 비행대대 VF-124


- 자료출처 : 컴뱃암즈 16호(1998년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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