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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horn
1941년 6월, 독일군의 소련침공작전은 그럭저럭 성공하는듯 보였다.
하지만 독일육군의 주력이었던 3.7cm와 5cm 대전차포가 T-34와 KV-1을 만나 쓸모없는 쇳덩어리가 되면서 주춤하게 되고 이에 독일군은 급하게 신형 7.5cm포를 배치하여 4호 전차와 3호 돌격포의 주포를 강화하고, 마더 시리지를 비롯한 대전차 자주포를 실전에 투입시킨다.
한편, 1942년 독일군은 신형차량 개발과정에서 쓰다 남은 차체에 10.5cm 포와 12.8cm 포를 탑재한 대전차 자주포를 시험삼아 실전에 투입시켰는데 의외로 뛰어난 위력을 실감한다. 하지만 프로토타입이라 대량생산된건 아니기에 독일군은 신형 대전차 자주포의 능력과 필요성을 가늠하게 되었고 당시 크루프사에서 개발정이었던 71구경 8.8cm 대전차포 Pak43에 주목한다.(이 포는 나중에 티이거 II와 야크트 판터의 주포로 탑재된다.)
Nashorn 생산을 위해 포는 크루프, 차체는 알케트사가 맡아 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예정된 제작수량은 1943년 5월 12일까지 총 500대였다.
그러나 Pak43의 제작은 계속 늦어졌고, 다급해진 크루프사는 Pak43 포가에 Pak41 포신과 폐쇄장치를 얹은 Pak43/41의 차량탑재형인 Pak43/1을 만들어 Nashorn에 장착한다.(1943년초) 1943년 3월 1일에까지 Pak43/41은 23문이 겨우 만들어졌고 독일군의 하계공세 시점에는 85대, 1943년말에는 345대, 1945년 5월 9일(독일군 항복)까지는 총 494대 제작되었다. 하지만 Nashorn의 위력은 매우 뛰어나서 독일의 모든 전선에 투입되었고, 특히 소련군 전차를 1발 격파할 수 있었던건 구축전차 Ferdinand와 대전차 자주포 Nashorn 밖에 없었다.
Hummel은 Nashorn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차체의 기본구조는 Nashorn과 동일하다. 다만 탑재하는 포가 다른데, 원래 Hummel은 10.5cm 유탄포를 탑재하여 경야전 자주유탄포로 쓸 예정이었으나 개발 도중에 15cm 포로 변경되었다.
(구경이 커지게 되어 Hummel의 탄약휴대량은 18발로 감소되었고, 이 때문에 포신없는 Hummel을 개조한 전용탄약운반차가 Hummel을 따라다니게 된다.)
이 기체는 F-5A의 파일럿 훈련을 위한 복좌형으로 동체는 T-38을 사용했다. 반면에 주익과 공기흡입구는 F-5A를 사용하여 복좌형인데도 F-5A보다 동체 길이가 약 26cm 짧다.
연료탑재량이 작아 항속거리가 짧아진 것을 제외하면 F-5A와 기본적인 성능은 동일하다. 그래서 T-38과는 달리 훈련과 전투 임무에 모두 사용이 가능하기에 경제적인 이유로 별도의 훈련기 운행이 어려운 국가에서 운용하기에 최적이었다.
F-5C Scoshi Tiger
미공군이 F-5A의 성능 테스트를 위해 스코시 타이거라는 특무부대를 편성하여 베트남전에 투입하였다. 이 부대에서 쓰였던 기체는 F-5A를 개조한 것으로 공중급유 프로브 장착, 엔진 아래 부분에 장갑판 설치, 5개의 파일런을 긴급투하가 가능하게 하였다. 미공군은 테스트 후에 이를 엔진 개량과 함께 C형으로 계획했지만 비용 문제로 취소되었다.
F-5D
F-5C의 복좌형. 단지 계획서상에만 존재한다.
KF-5E/F 제공호
RF-5A는 F-5A의 페어링에 카메라를 장착하여 정찰용으로 사용한 기체. 중소국가에서 저예산 정찰기로 운용되었다. RF-5E는 F-5E에 카메라를 장착한 것으로 RF-5A에 비해 더 많은 종류의 센서 탑재가 가능하다.
Fang을 단념한 Northrop社는 눈을 해외로 돌려 NATO, SEATO(동남아조약기구), 중동국가가 보유하고 있던 1세대 제트 전투기를 대체할 새로운 전투기에 대해 검토를 시작하였다. Northrop社는 기술진을 세계 각국에 파견하여 데이터를 수집하였고 알맞은 성능에 가격이 저렴하며, 취급이 용이하고, 신뢰성이 높고, 짧은 활주로에서도 이착륙이 가능한 전투기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세계 각국은 미공군이 개발 중인 센추리 시리즈와 전혀 다른 성격의 전투기를 원하고 있었고, 노후화된 제1세대 전투기를 보유 중이던 나라들은 신기종으로 교체를 희망하고 있었으나 고가의 센추리 시리즈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착안한 Northrop社는 1955년대 초부터 새로운 성격의 경량전투기 개발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N-102기의 구조를 변경시킨 N-156 계획이 시작되었고 이와 동시에 미공군은 기존의 T-33 고등훈련기를 대체할 음속비행이 가능한 차기 제트 훈련기 소요를 발표하였다.
Northrop社는 우선 고등훈련기 사업을 위해 N-156 계획을 고등훈련기쪽으로 방향을 수정하였고 N-156의 조종석을 2인승으로 개조한 N-156T를 미공군에 제시하였다. 이 기종은 비용 대 효과면에서 인정받아 1956년 7월에 채택되어 1959년에 첫 양산형 비행에 성공하였다. 이것이 바로 T-38 Talon이다.
미공군의 고등훈련기 사업에 T-38이 선정된 Northrop社으로서는 자금 걱정 없이 해외수출용 전투기 계획인 N-156F에 다시 여력을 쏟아부었다. N-156F는 1959년 5월 30일에 1호기를 공개하였으며 7월에는 첫 비행에 성공하였다. 당시 N-156F에 장착된 엔진은 후연기가 없는 YJ85-GE-1(추력 955kg)이었고 2호기는 후연기가 장착된 J85-GE-5(추력 1,745KG)를 장착하여 초음속 성능을 확보했으나 3호기를 제작하던 도중에는 미공군은 효용성 및 F-104를 의식해 평가시험을 중단하기도 했다.
1960년대가 되어 미국은 동맹국과 우방국의 공군력 강화를 위해 이들 국가에 대한 군용기 원조 프로그램을 재실시하기로 시작했는데, 이 프로그램에는 Northrop社의 N-156F가 선정되어 N-156F는 다시 빛을 발하게 된다. 초음속 성능의 N-156F로 소련의 MiG-19를 대응할 수 있고, 동맹국과 우방국에 초음속 전투기를 공급하면서도 항공기 탑재 레이더 기술의 유출은 방지할 수 있는 최적의 기종이었던 것이다.(Northrop社는 화력제어 레이더를 N-156F에 장착하려 했지만, N-156F의 기수가 작아서 탑재할 수 없었음) 이런 이유로 선정된 N-156F는 곧바로 양산형 체제로 진행되었고, 1963년 5월에 YF-5A 1호기(N-156F 3호기) 첫 비행에 성공했고 10월에는 F-5A가 첫 비행에 성공한다.
마츠무라 츠토무
(예비역 육상자위대 소장 / 日本軍事硏究 1997년 10월호)
정찰, 근접지원, 제공권, 수송, 전략폭격…. 공군의 임무는 여러 분야에 걸쳐있으나 강한 기체를 보유하고 있는 공군이 결코 강한 공군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시대를 개척하는 새로운 전술교리를 가져야만 비로소 강한 공군이 되는 것이다. 독일은 전격전을 고안해냈다. 항공자위대는 미국의 흉내를 그만 두고 일본의 하늘에 적합한 자신만의 교리를 명확히 하라!
만들기 쉬운병기
레이건 대통령 시절의 이야기이다.
"드디어 미국이 본격적인 우주 전쟁 시대의 군비(軍備)에 돌입했습니다. 우주 병기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죠. 이제는 일본이 국방력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시대가 아닙니다.”
일본의 군사전문가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 하나는 정치론, 법률론으로부터 전략론을 이끌어 내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병기의 성능으로부터 전략을 논하는 사람들이다. 전술로부터 논하는 사람들이 없다. 이 두 타입의 전략가들은 미국의 우주전쟁론에 매우 놀랐다. 레이건은 소련뿐 아니라 일본까지도 깜짝 놀라게 한 것이다. 중국도 놀랐을지 모르나 개혁개방노선이라는 경제우선정책을 가속화하였다. 그러나 유럽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역사에 기초를 두고 레이건의 전략을 관망했다. 그들은 우주전쟁 준비의 경쟁에 휩쓸리지 않고 계속해서 재래병기의 연구개발에 힘을 쏟았다.
"우주병기의 개발보다 어려운 것은 대기권 비행기의 개량이다. 그 중에서도 어려운 것은 헬리콥터인데 왜냐하면 공기라는 저항이 있고 비나 바람이 있으며 온도차가 균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면 배를 설계하는 쪽은 더 어려워. 그리고 잠수함은 훨씬 더 어렵고. 물의 저항을 극복하는 병기가 공기의 저항을 극복하는 병기보다 개발하기 곤란하다고 한다면 육상의 병기는 더 어려워. 육상의 병기 중에서도 땅속에 잠복하는 병기는 훨씬 더 어렵지. 뭔가 이상한 논의야. 그렇다면 땅을 달리는 전차보다 하늘을 나는 전차쪽이 만들기 쉽다는 얘기야? 중력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이 이론은 반대가 되는데? 하늘을 나는 전차나 군함이 가능하다면 육상을 달리는 전차의 중량은 그 몇 배에 달하는, 대단한 것이 될 수 있어."
"우주전함 야마토의 크기는 해상전함 야마토의 몇분의 일이라는 얘긴가?"
이 단순한 논의가 항공기 본성의 틀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운용의 틀도 정하고 있다. 중력을 극복할 수 있었다면 항공기의 설계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항공기는 가솔린 엔진의 출현에 의해 탄생했다. 항공기의 역사는 확실히 엔진의 발달과 함께 진행해 왔다고 얘기해도 좋다.
정찰과 근접항공지원
전쟁에 항공기를 사용한다는 개념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시도되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1908년, 임시군용 기구 연구회가 발족되어 1910년 도쿠가와 쿠우헤 대위가 지금의 요요기공원 자리에 있었던 연병장에서 쌍엽기인 앙리 팔망(Henri Farman)을 타고 최초로 비행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항공기는 전쟁의 최초부터 참가했다. 그 당시의 임무는 정찰, 경계, 포병의 착탄 관측이었다. 오늘날의 조종사들이 그리 좋아하지 않는 항공부대의 임무이나 기본 사명의 하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국본토에 대해 제펠린(Zeppelin) 비행선이 본격적으로 폭격을 시작한 것은 1915년 1월로 여덟 차례에 걸쳐 계속 되었다. 이 폭격은 심리적 작전이어서 육상 작전과는 어떠한 연계도 없었다. 최초로 대규모 항공폭격이 지상작전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행해진 것은 1918년 9월, 연합군의 산뭴공세였다. 미 공군 대령 William Mitchell이 지휘하는 600기가 대성공을 거두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항공기의 유용성에 세계의 군대가 주목했다. 그 후 이탈리아는 1934년, 에티오피아 전쟁에 서항공폭격과 지상부대에 대한 근접항공지원(폭격이나 총격에 의해 육상부대 전방의 적을 공격하는 것)을 실시, 큰 효과를 거두었다. 1936년부터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의 군사이론 실험장이 되어 항공 전력의 유용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항공전력이 실제로 실력을 발휘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전격전이있다. 구데리안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왜 돌파가 좌절되었는가를 연구하고 전차를 핵심으로 하는 돌파 작전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이 신속한 돌파에 보조를 맞출 수 있는 포병이 없었다. 이에 따라 구데리안은 포병 대신에 융커스 Ju-87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를 사용하였다. 이 전술교리에 의해 독일군은 1939∼40년, 폴란드, 노르웨이, 프란다스, 프랑스를 순식간에 석권하였다. 이와 같이 독일군은 항공전력의 운용에 있어 탁월함을 보였으나 실제적인 의미에서의 항공전력의 신교리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독일군의 항공운용은 기본적으로 지상부대의 전투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육상부대가 주인공이고 공군은 보조자였다. 지상부대의 작전에 직접 협력하여 화력지원하는 '근접항공지원'은 항공부대의 기본적인 사명이 되었다. 미 / 영 공군은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근접항공지원을 육군의 지휘하에 넣지 않고 육군과 협동하는 신 전술교리로 개발하였다. 이러한 개발은 1942년, 아프리카 군단을 지원하고 있던 독일공군을 항공전력의 집중력과 유연성으로 기습할 수 있게 하였다.
제공권 다툼
당시, 영국은 공군운용에 대해 걸음마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신 전술교리의 개발에 있어서는 독일보다 앞서 나갔다. 확실히 군사력의 진보는 전술교리의 개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역사적인 실례였다. 그 성과는 '영국전투' 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영국 공군에 의해 개발되고 미 공군에 의해 다듬어진 공군의 전술교리는 '제공권', '전략항공공격(전략폭격과 항공저지)', '근접항공지원'의 개념이었다.
제공권의 획득 또는 항공우세는 전략항공공격과 근접항공지원의 전제일 뿐만 아니라 방어작전에 있어서도 긴요한 요소라고 인식되어졌다. '항공우세의 획득' 또는 적어도 '적에게 효과적인 항공우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은 전략 폭격을 저지하고 국가의 경제 및 산업력을 지키며 육/해군의 전력을 보전하기 위한 불가결한 전투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제공권의 귀추는 군인 뿐만 아니라 일반시민의 사기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제공권의 획득은 단순히 적 항공기를 공중에서 격파하는 '공중전'뿐만 아니라 '적 기지의 파괴 및 점령'을 이루어야만 가능하다. 여기에서 공군은 해군과 같이 '기지를 어떻게 전략적으로 전개하고 어떻게 전술적으로 이용할 것 인가'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렇게 공군은 육군, 해군과 함께 중요한 군사적 지위를 획득했던 것이다. 전투를 계속하면서 공중전의 성과가 매우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기지를 파괴하여도 바로 수리, 회복할 수 있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활주로에 폭탄이 한 발 떨어지는 것을 'one cut'라고 하는데 one cut 정도의 피해는 몇 시간 후면 회복되어진다. 3일 이상 사용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three cut 이상의 폭격이 필요하다.
이렇게 며칠 동안 비행장의 사용이 불가능하다면 어느 정도 항공기가 건재하더라도 항공기의 사용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지상에 있는 항공기는 쉽게 항공공격의 목표가 되므로 한 개 비행장을 사용하는 항공기의 수는 제한을 받게 된다. 한 개 비행장을 기지로 이용하는 항공기의 기수는 최대 50기, 가능하면 25기 이하가 바람직스럽다. 기지에 있는 항공기는 방공호에 분산되어 숨어있어야 한다. 방공호는 공군기지의 또 다른 조건이다. 이 원칙은 오늘날에도 통용된다. 항공자위대가 보유하는 비행장의 수는 작전기수에 비해 너무 적다.
오늘날에는 탄약, 미사일, 그 외의 장비들을 항공기에 탑재하는데 특수한 공구들을 필요로 한다. 유사에 있어 민간 비행장을 사용할 경우 이와 같은 공구나 방공호가 없고 탄약 등이 집적되어 있지 않으면 기지라고 말할 수 없다. 더구나 방공능력도 없다. 항공자위대가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의 하나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기지의 조건을 정비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기지의 방공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기지방공용 대공화기'가 탄생했다. 대공화기가 탄생하자 제공권을 얻기 위해 기지를 공격할 때 먼저 기지방공 시스템을 격파 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둘째로 아군 기지를 어떻게 배치하고 적 기지를 어떻게 점령하는가 하는 것이 전략적, 작전적 과제가 되었다. 단순히 적 기지를 격파하는 것만으로는 제공권의 지속적 획득 및 유지가 불가능하다. 적의 기지회복을 끊임없이 감시 하고 때때로 기지공격을 반복해야만 한다. 기지가 이에 대응하여 공중전에 의한 기지방공을 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기지방공은 공중전과 대공화기에 의한 조합이 되어 이 분야에 있어서도 전술교리의 개발이 요구되었다.
대전(大戰)이 시작되자 곧 대공레이다가 개발되었다. 제공권의 쟁탈은 레이다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영국전투는 레이다에 의한 영국공군의 승리였다. 당초 레이다의 운용은 과학자들의 병기 기술론으로부터 전술 교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그들은 즉시 전사(戰史)를 파헤쳐 싸우는 방식의 경향을 파악하여 전술교리를 변경하였다. 이것이 작전연구의 시작이었으며 '전술교리는 전사에서 배운다.'라는 원칙의 확인이었다. 제공권을 다투는 싸움이 공중전과 기지공격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자 이 두가지에는 커다란 차이가 생겼다. 공중전은 탑재하고 있는 화력을 다 사용할 때까지 전장에 남아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전장에 오래 남아있는 쪽이 유리하다. 자연히 기지로부터 전장까지의 거리가 짧은 쪽이 유리하다. 한편, 기지공격은 탑재 탄약과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시간만 있으면 된다. 재빨리 대지공격을하고 전장으로 부터 빨리 이탈하여 귀환하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항공기에는 pay load라는 전투력의 제한이 있다. pay load는 연료와 탄약 등의 탑재중량총계를 의미한다. 멀리 있는 기지를 공격하려면 탑재탄약량은 적어진다. 만약 공격에 필요한 충분한 화력을 탑재할 수 있다면 기지 공격은 out range 공격이 바람직하다. 권투를 예로 들면 공중전은 접근전을 펼치는 dog fighter이고 기지공격을 리치를 이용한 out boxing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 기지를 빼앗는다. '적 기지의 점령'이다. 적 기지의 점령은 알렉산더 대왕의 원칙처럼 육군에 의한 작전이 필요 하다. 이와 같이 육군의 임무에 해군기지, 공군기지의 점령이라는 임무가 더해지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볼 때 어떻게 기지를 전개하고 쟁탈했는가에 초점을 맞춰보면 항공전략의 시점으로부터 교훈을 얻게 된다.
오늘날 국제군사정세를 분석하는데 있어 최초의 평가항목으로서 논의되어지는 것이 해/공군기지의 배치이다. 예를 들어 대만해협의 긴장을 분석할 때, 대만에 있는 비행장과 해안 건녀편 福健省에 있는 중국 공군기지의 배치를 가장 먼저 평가하게 된다. 중국 공군의 보유기가 아무리 많더라도 대만해협에서 작전할 수 있는 항공기의 수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
제공권 쟁탈 다툼은 공군 자신을 위한 전투로 육상부대나 해상부대에 대한 직접적인 효과는 없다. 전술적으로 보면 육군의 포병끼리 서로 공격하는 대포병전과 동일한 것이다. 또한 제공권 쟁탈은 전력을 경주하여 실시하여야 하는 전투이므로 육군의 적 항공기지 점령을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육군이나 해군 전투 모두 공군의 제공권 쟁탈의 귀추를 한가로이 기다리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육 / 해군의 공군에 대한 요구와 공군 자신의 요구가 일치하지 않게 되었고 공군과 육 / 해군은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해군은 자기 나름의 공군을 갖게 되었고 육군은 공군의 독립을 반대하는 원인을 만들었다. 이것이 역사이다.
전략폭격
제1차 세계대전은 군비를 정비한 국가(무장국가)의 전쟁이 아니라 군비와 무기생산력을 지닌 국가(전시국가의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냈다. 전쟁이 '전선의 전사'와 '총후의 전사'에 의해 전개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1921년 이탈리아의 도웨 대령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이탈리아 국방정책과 이탈리아 군의 추태를 비판하고 군법회의에 의해 투옥되었다. 그 후 명예가 회복되어 군에 복귀한 도웨 대령은 대장을 역임한 후 퇴역하여 '제공권' 이라는 책을 지었다.(오늘날의 일본에서는 현역 자위관이 정부의 국방정책, 자위대의 군사이론을 비판할 경우 즉시 문제가 되어 퇴직을 강요받게 된다. 게다가 퇴직한 자위관은 그 주장을 책으로 써내지도 않는다) 도웨는 이 책에서 공군의 독립과 전략폭격의 주요성을 설명하여 세계의 공군이론을 리드했다. 공군의 중요한 사명은 '총후의 전사를 공격하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처음으로 공습을 지휘한 미첼도 전략공군의 창설을 주장 했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개전초에는 많은 항공기를 잃었으나 그들이 창조한 공군 전술교리에 의거 영국전투에서 독일 공업지대에 대한 공세적 전략폭격을 계속하였다. 당시에는 전략폭격을 도와 줄 장거리 전투기가 없었기 때문에 폭격기의 손실을 피하기 위해 야간에 폭격을 실시하였다. 이에 맞서 독일은 즉각 방공전투력을 일으켜 세워 영국 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한편 영국의 야간폭격은 매우 부정확해 독일의 많은 일반시민들이 사망하였다. 미국의 아놀드 장군은 도웨나 미첼의 이론을 강력히 실행하고 공군을 독립시켰다. 미 공군도 당초에는 전략폭격을 도울 수 있는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략폭격기 자체에 강력한 대공전투능력을 장착하였다. '하늘의 요새' B-17의 탄생이었다.
하늘의 요새를 보유한 미국의 전략폭격은 정확한 파괴에 중점을 두어 주간에 공격을 실시하였다. 영국과 미국 공군이 주야에 걸쳐 실시한 전략폭격으로 인해 독일의 공업력은 급속히 저하되었다. 전략푝격은 해군에 의한 '봉쇄'보다 적 생산력에 대한 효과가 직접적이었다. 성공의 열쇠는 '양'이었다. 미 공군은 곧바로 폭격기와 동행할 수 있는 전투기를 개발하였다. 그리고 더욱 강력한 폭격기인 B-24, B-29를 개발했다. 이에 의해 미 / 영 폭격기의 손해는 급속히 감소하였다. 미 공군은 독일에 대한 전략폭격을 다듬어서 대닐 전략폭격을 실시하였다. 일본은 곧 공업생산력을 잃었고 전략폭격 이론의 궁극이 된 '히로시마 / 나가사키 원폭 투하' 를 맞이하게 되었다. 1927년 육군은 87식 중폭격기, 경폭격기를 국산화하였고, 1932년에는 88식 정찰기인 아이쿠니 경폭격기를 만주전장에 투입하였다. 熱河작전에서는 87식 폭격기가 참가했으며 日航(만주항공)의 민간기가 수송기로서 참전 했다. 1933년 오랜기간의 연구가 결실을 맺어 '소년비행병'이 탄생하였고 1938년 육군항공사관학교가 독립하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끝내 공군이 독립하지 못했다. 1936년 육군은 항공전력의 증강을 계획하고 97식 번호를 붙인 전투기, 폭격기, 정찰기를 개발하였다. 일본도 전략폭격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1939년 支那사변에서 重, 蘭洲, 成都를 폭격기 약 30∼100기로 장기간(11∼20일간)에 걸쳐 폭격했다. 그러나 '총후의 전사'를 공격하는 일본의 전략폭격은 여기까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상대는 미국과 유럽이었기 때문에 폭격은 불가능했다. 그에 따라 전략적 폭격은 적국의 총후를 폭격하는 것이 아니라 전장에 침임해 오는 적 전력을 저지 / 제한하거나 약화시키는 목적으로 전환되었다. 이와 같은 의미의 폭격은 유럽과 아프리카 전장에서도 행해졌다. '항공저지폭격'이라는 항공운용개념이었다.
공수작전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작전과 지중해작전(1940년)은 대규모 '공정작전'의 시작이었다. 노르망디상륙작전에서는 미군 이 작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태평양의 빌마전장과 중국 장개석 군을 지원하는 작전을 통해 대규모 공수 작전이 위력을 발휘하였고 새로운 사명이 부가되었다. '공수병참'이다.
냉전시대와 오늘날의 공군
항공전력과 공군운용의 전술교리가 엔진의 발달에 따라 변천해 왔음은 최초에 서술한 바와 같다. 제2차 세계대전 말이 되자 독일은 제트가와 V-2 미사일에 의한 전략공격을 개발했으나 이미 전운은 기울어져 있었다. 열강들은 항공기의 제트화와 미사일 개발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전쟁에서는 제트기가 큰 활약을 하였다.
초기의 제트기들은 레시프로 엔진기에 비해 항속거리가 짧았다. 레시프로기는 고고도에서의 비행성능이 떨어진 반면 공기밀도가 높은 저공에서는 프로펠러의 추진효율이 좋았졌을 뿐만 아니라 적 레이다에 발견되지도 않았으며 저공접근에도 용이했다. 이에 반해, 제트기는 저공에서의 큰 공기저항으로 인해 연료의 소비가 컸다. 제트기는 비행속도를 증가시킬 경우, 급속히 연료소비가 증가한다. 그 증가계수는 레시프로기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제트 전투기는 공식 최대속도로 비행할 경우 공식 전투항속거리가 전반이하로 떨어진다.
한편 제트엔진의 추력은 끝없이 발달하여 항공기의 속도와 운반력을 증대시켰다. 다른 한편으론 미사일 기술이 발달했다. 또 전자기술이 발달하여 대 레이다 작전이 중요해졌으며. 이 결과 제2차 세계대전에 정착된 공군의 사명은 개정되기 시작했다. 그 사명을 정리해보면'항공정찰', '항공경계', '포병의 사탄 관측', '항공우세의 취득', '근접항공지원', '전략폭격', '항공저지', '공정작전', '공수병참', '대전자전' 등을 들 수 있다. 신속성과 오랜시간의 재공(在空)이요구되는 항공경계와 포병의 사탄관측은 제트기에는 적당하지 않아 헬리콥터가 담당하게 되었고 각각 육군과 해병에게 기능을 반환하였다. 원래 이 기능은 공군이 독립했어도 육/해군이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항공정찰은 오늘날에도 공군의 중요한 사명으로 전략 / 전술 정찰기는 공군의 필수장비가 되었고 전략폭격은 핵 폭격에 주안점을 두게 되었다. 물론 운반탄량이 거대하기 때문에 재래폭탄에 의한 폭격도 유용하나 대공미사일의 발달로 인해 1기의 폭격손해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B-29의 상용폭탄 탑재량(3톤)은 제트전투폭격기에 의해서도 탑재될 수 있게 되었다. 이 결과 핵전략을 필요로 하는 미국을 제외한 열강들은 폭격기의 수를 급속히 감소시켰다. 항공저지도 손해극소화와 폭격효율이라는 관점에서 폭격기보다는 전투폭격기가 더 뛰어났다.
공정작전은 더욱 큰 문제를 갖고 있었다. 육군의 전투력이 기계화 되어감에 따라 강하한 육군병사의 구보, 경무장으로는 싸울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공정대원의 강하시에는 저속의 비행속도가 요구되어 제트기는 비행속도의 범위를 늘려야만 한다. 저속비행과 고속비행이 가능한 공정용 수송기의 설계는 어려운 문제를 포함한다. 이에 더해 대공미사일의 발달로 이러한 종류의 항공기들은 취약성이 증대하였으며 한발의 피탄에 의한 희생이 너무 컸다. 열강, 특히 소련과 미국은 중량물자 투하의 공정작전 개발에 노력했으나 투하할 지형의 선택에 제한을 받아 사실상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의 과제이다. 아마 헬리콥터를 사용하는 육군과 해병대에 사명을 반환하게 될 것 같다.
항공병참에 있어서는 제트전투기의 전투항속거리를 늘리는 것이 긴요한 과제가 되어 공중급유기가 개발되었다. 또한 제트 수송기의 운반능력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어 비행장의 가치를 전략적 / 전술적으로 긴요지형의 지위에 끌어 올렸다. 제2차 세계대전시 육군에게 요구한 '공군기지의 점령', '공군기지의 방어' 임무는 앞으로의 커다란 전술교리과제이다. 동시에 적은 반드시 해상으로부터 상륙하여 침공할 필요가 없고 아군의 양호한 공군기지를 점령하여 그곳을 작전기지로 사용, 대규모 지상작전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도시국가에 방공군
이상과 같은 변혁들을 정리해보면 공군의 전술교리는 미사일의 발달로 인해 어려움을 맞이하고있다. 공군운용의 발달은 정찰로부터 시작되었고 항공화력의 투사를 정점으로 항공수송, 전자전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그 전제로서 항공우세 쟁탈이라는 공군의 독자적 운용이 탄생하였다.또한 가장 중요한 기초적 사항으로 '항공기지의 취득, 적 항공기지의 파괴/점령' 및 '기지방공'을 들수있다. 현재의 공군 운용중점은 '항공우세', '근접항공지원', '전략폭격?항공저지폭격', '항공정찰', '항공병참', '전자전'으로 좁혀져 있다. '공정작전'은 헬리콥터에게 그 사명을 양보하고 있다. 전략 / 전술 미사일의 발달로 인해 '기지방공 / 전략요지방공'은 공군의 중요한 사명이 되었다. 이중 '기지방공'은 공군의 사명으로 남을 전망이나 '전략요지의 방공'은 공군의 사명에서 제외시켜 오로지 이 임무만을 담당하는 '방공군'에게 육 / 해 / 공군, 해병대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필요할 듯 하다. 미사일은 기지방공, 요지방공의 유효한 수단이다. 또한 순항미사일과 같이 전략폭격이나 항공저지 폭격을 대신할 가능성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한 발의 미사일이 옮길 수 있는 탄두의 탄약량은 핵무기가 아닌 한 매우 제한을 받는다. 게다가 멀리 있는 미사일 기지에서 발사하는경우, 정확도가 좋더라도 전황(戰況)이 요구하는 전기(戰機)에 맞춰 공격하는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다. 비행에 시간이 걸리기 대문이다. 그보다는 항공기에 의한 폭격의 경우가 탄량이 훨씬 많고 고속이기 때문에 파괴력이 크다. 결국 미사일의 운용은 미사일을 항공기에 탑재하는 쪽이 훨씬 합리적이다. 또한 유연성과 신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항공기의 가치는 없어질 수 없다.
도시 등의 요지방공을 위해 미사일 요격용 미사일을 탑재한 항공기를 개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일본의 기술이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자위대의 현실정을 보면 우선 요지 방공군이 없다. 이 상태로는 도시주민들이 전쟁을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도시국가가 전쟁에 취약한 것은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나타난 현상이 아니며.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 부터 문제가 되어왔다. 다행히 일본은 섬나라이다. 도시에 대한 위협의 주체는 전략폭격과 미사일 공격이다. 방공 전투시스템을 구축한다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관계없이 평화헌법을 이유로 전쟁에 대비해오지 않았던 정치가들의 책임은 매우 크다. 군용비행장의 수도 적고 전략정찰기도 없다. 전략폭격기까지는 필요치 않을지도 모르나 전략폭격이나 항공저지폭격도 정치가들은 금지하고 있다. 難島방위에 필요한 해병대도 없다. 적 항공기지의 점령 등은 꿈 같은 얘기이다. 항공자위대를 보는 한 일본은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라의 국방을 미국에 의존하는 속국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은 과연 미국을 태양으로 생각하는 해바라기인 것인가!!
대개 어느 한 전투기의 개발사를 살펴보면 노후된 구형 전투기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이 시작된 경우가 많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F-14 톰캣의 경우는 1950년대 이래 미해군이 꿈에도 그리던 전천후 함대방공 전투기 계획이 여러 차례 좌절 끝에 마침내 현실로 이루어진 특이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F-14는 1970년에 첫 비행을 시작한 이후 30년 동안 미해군의 주력 함상 전투기였다. 지금은 F/A-18E/F 호넷이 뒤를 이었지만 함대방공 및 제공전투 능력면에서 F-14는 아직도 최강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F-14A가 처음으로 실전배치된 1972년 이후 1980년대까지는 F-14의 가장 화려했던 시기로서, 이 시기의 F-14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최강의 함상 전투기였다. 또한 이 시기는 일시적으로 무려 30개의 F-14 비행대가 유지되기도 했으며, 기체도색도 컬러풀한 고시인성 마크를 상당부분 유지하고 있던 시기로서, 이 시기의 기체들은 항공기팬들 사이에 인기가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