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어느 한 전투기의 개발사를 살펴보면 노후된 구형 전투기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이 시작된 경우가 많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F-14 톰캣의 경우는 1950년대 이래 미해군이 꿈에도 그리던 전천후 함대방공 전투기 계획이 여러 차례 좌절 끝에 마침내 현실로 이루어진 특이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F-14는 1970년에 첫 비행을 시작한 이후 30년 동안 미해군의 주력 함상 전투기였다. 지금은 F/A-18E/F 호넷이 뒤를 이었지만 함대방공 및 제공전투 능력면에서 F-14는 아직도 최강이라 불릴 자격이 있다.
개발이 중지된 미사일리어
1950년대말 미해군은 장거리 공대지 및 공대함 미사일을 장착한 소련의 장거리 폭격기의 크나큰 위험에 직면하고 있었다. 당시 한창 경쟁적으로 각국이 개발한 각종 미사일은 사정거리와 명중율면에서 점차 성능이 향상되어 수백킬로미터 밖에서도 미해군의 항모기동부대를 공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원거리에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회피하는 소련의 위협에서 벗어나려면 가능한한 적기를 함대에서 멀리 떨어진 발견 지점까지 마중나가서 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 확실하게 격추시켜야만 했다. 요즘이야 대함 미사일 격추가 용이하지만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어려운 일이었고, 미사일 발사모기가 미사일을 발사하기 전에 미리 격추시킬 수 있도록 장거리 수색 및 추격, 공격 능력을 갖춘 함상 전투기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당시 미해군이 이처럼 항모기동부대의 방공력에 큰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SLBM을 갖춘 원자력 잠수함이 출현하기 이전까지 미해군의 항공모함은 핵폭격기를 적재하는 미국의 핵보복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공군의 핵폭탄
이러한 소련의 전략에 맞서기 위해 장거리 수색 및 추적이 가능한 레이더와 장거리 AAM을 탑재할 수 있는 함대방공 전투기만이 해답이라는 결론에 따라 개발이 시작된 장거리 AAM은 1958년 12월에 벤딕스(Bendix) / 그루먼(Gruman)팀이 선정되어 XAAMN-10 이글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이글은 핵탄두를 장착한 최대속도 마하 3.4의 2단식 AAM으로 사정거리가 160km 이상이며 발사후 무선유도방식을 사용하며 중반 이후 미사일 내부에 탑재된 레이더를 사용하여 스스로 목표물을 찾아가는 액티브 레이더 호밍 방식을 사용하였다.
한편, 이글 미사일을 탑재한 전투기는 1959년 미해군에서 제시한 요구사양에 대해 6개의 메이커가 새로운 설계와 기존의 기체 개량 등의 안을 제시하였고 1960년 7월에 더글러스의 모델 D-9766이 선정되어 "F6D 미사일리어" 개발이 시작되었다.
미사일리어는 대형 레이더 안테나와 FCS(화기제어장치)를 장비하고 있었으며 주익에 6발까지 이글 AAM을 탑재하고 비상시에는 동체 아래에 2발을 추가탑재할 수 있었다. 미사일리어는 완전무장 후 함대를 이탈하여 4~6시간 동안 초계 비행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항속력을 갖출 예정이었다. 최대속도가 마하 0.9밖에 안 되는 아음속 전투기에 미해군이 그토록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F-4 팬텀II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 장시간 비행능력 부족 - 를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개발되어 실전배치가 시작된 팬텀은 스패로 AAM로 장착 가능하고 속도도 마하 2 정도였지만 연료 소모가 많아 원거리 장시간 비행이 어려웠다. 따라서 초음속 비행 능력을 포기하고 장시간 공중에 머무를 수 있는 미사일리어 구상이 떠오른 것이다.
미사일리어는 원래 항속 성능을 높이기 위해 연료 소모가 적은 JTF10A 터보팬 엔진 2기를 장착하려 했다. 이 엔진은 세계 최초의 군용 터보팬 엔진으로 나중에 TF30-P-2란 형식번호로 F-111B와 F-14A에까지 탑재되었다.
미사일리어는 장시간 비행을 위해 조종사 2명과 미사일 유도 관제사 3명이 탑승하며 레이더 FCS는 웨스팅하우스의 APQ-18을 탑재할 예정이었다.(APQ-18은 16개 목표물을 추적하고 8개 목표물을 동시공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공격기 부대 호위, 대지 및 대함 공격 임무를 전혀 맡지 않고 함대방공 임무만을 수행하는 단일 목적 전투기라면 필요기수가 극히 적었을 뿐 아니라 비용대 효과면에서 나쁘기 때문에 찬반 논란이 일었다. 1961년 1월 케네디 정부가 들어서면서 취임한 로버트 S.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비용절감을 이유로 들어 그 해 4월에 미사일리어 개발계획과 이글 AAM 개발을 중지시키고 만다.
TFX와 FADF
F6D 개발중지 이전에도 미해군은 제공전투가 가능한 새로운 함대방공 전투기 FADF(Fleet Air Defence Fighter) 구상을 세워놓고 있었다. FADF는 초음속 비행이 가능한 본격적인 전투기로 F6D도 FADF가 실현될 때까지의 임시적인 전투기에 불과했다.
한편 미공군은 F-105 선더치프의 후계를 찾고 있었는데 최대속도 마하 2.5에 핵폭탄 장착이 가능하고 대량의 무장탑재력 및 저고도 장거리 침투능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전투기에 대해 NASA는 새로 개발 중인 가변익을 미공군에 건의하여 1960년 6월 SOR103이란 명칭으로 개발 검토가 시작되었고 나중에 TFX(Tactical Fighter Experimental)란 명칭으로 구체화되었다. TFX는 임무의 성격상 전술 전투기라기 보다는 소규모 전략 폭격기에 가까운 존재였으며 미공군의 요구사항에 미루어 볼 때 기체의 크기가 대형화될 것이 충분히 예상되었다.
그러나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포드 자동차 부사장 출신답게 원가회계 개념을 지향하여 국방비 지출도 "비용 대 효과"라는 잣대를 들이대었고, 이에 따라 FADF와 TFX도 통합하여 개발비용을 절감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양 기종의 성격이 다른 관계로 공동개발이 불가능하다는 검토 결과에도 불구하고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최소 85% 공통성을 유지시켜 개발비를 절약하는 한편 3천기 이상의 양산을 목표로 공동 전투기 개발을 명령하였다.
결국 1961년 10월 1일 새로운 제안 요구서가 발행되었고, 1962년 11월 제너럴 다이나믹스 / 그루먼의 안이 채택되었다. 제너럴 다이나믹스는 공군형과 해군형의 공통점이 높았고, 그루먼은 전통적으로 함재기에 강했기 때문이었다. 공군형은 F-111A, 해군형은 F-111B란 명칭으로 각각 18기, 5기가 발주되었다.
F-111B의 개발 실패
F-111A는 F6D에 탑재 예정이었던 TF30 엔진에 애프터 버너를 추가한 TF-30-P-1을 2기 장비한 병령 복좌의 대형 전투기였다. 또한 저공침투의 폭격 임무를 위해 지형 추적 레이더와 목표 포착 레이더를 장비하였고, 미공군의 항속력 / 탑재량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점차 대형화되어 갔다.
반면에 해군형 F-111B는 기본 형태는 F-111A와 같고 제너럴 다이나믹스가 개발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항모 운용을 위해 기수를 줄여 전장이 A형보다 짧았으며 주익은 착함시 저속비행 문제 해결을 위해 A형보다 커졌다. 또한 제공 및 함대방공 임무를 위해 휴즈의 AN/AWG-9 레이더와 AIM-54(XAAM-N-11) 피닉스 AAM을 장비하였다.
1965년 5월 8일 F-111B는 첫 비행을 실시하였으나 엔진의 실속 문제와 중량 초과 문제로 항모 운용 불가 판정을 받고 개발이 중지되었다. 특히 계획 중량이 약 22톤에서 약 28톤으로 수정되었음에도 실제 개발에는 약 31톤까지 늘어났다. 이에 설계 변경을 통해 중량 감소를 추진했으나 A형과의 공통성은 80%에서 29%로 급격히 낮아졌고 결국 무장과 연료를 완전탑재할시 총 중량이 최고 36톤까지 늘어나자 개발비 상승으로 해군은 개발을 중지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애초에 공군의 전폭기와 해군의 제공/함대 방공 전투기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구상은 무리였고, 그나마 해군이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명령에 따라 울며 겨자먹기로 개발하다보니 개발이 원활하게 될리 없었다. 결국 F-111 프로젝트는 미공군 단독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F-111B가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미해군으로서는 개발과정에서 가변익 기술, TF30 터보팬 엔진, AN/AWG-9 레이더, AIM-54 피닉스 AAM 개발기술을 고스란히 F-14 계획에 담을 수 있었다.
VFX
F-111B가 중량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을 때 그루먼사는 F-111B가 실패할 것이라 예상하고 자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F-111B의 스펙을 그대로 담아낸 새로운 함상 전투기 모델 303이 그것이다. VFX-1이라 불린 전투기는 제공/함대 방공 임무 외에도 공격기 호위, 요격 임무까지 가능하게 설계되었다.
그루먼사는 1953년 모델 97이 보우트 F8U 크루세이더에, 1955년 모델 118이 맥도넬 더글라스의 F4H 팬텀II에 패배한 실패를 만회하고자 자체적으로 연구를 진행하였고 1967년 10월에 VFX-1(TF30 엔진)과 VFX-2(ATE 엔진) 계획안을 미해군에 제안하였다. 미해군은 F-111B의 시스템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도 크기가 F-4 수준으로 대폭 축소된 VFX에 큰 관심을 보였다.
미해군은 1967년 11월부터 1968년 3월까지 5개월 동안 F-111B와 VFX의 비교분석작업을 실시하였고 당시 미해군 주력기였던 F-4J 팬텀II보다 우수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특히, 베트남전을 교훈삼아 VFX의 우수한 기동성에 주목했다.
한편, 1967년 모스크바 에어쇼에 등장한 소련의 제3세대 전투기 MiG-23, 25, Su-15 등이 미공군/해군의 주력기인 F-4를 능가한다는 분석이 나오자 미해군은 VFX를 최대한 빨리 실현시키기를 희망하였고 F-111B의 개발중단과 함께 각 전투기 사업자에 VFX 요구 조건을 제시하였다.(미해군은 그루먼의 VFX 계획을 이미 선택한거나 다름없었지만 F-111B 개발을 중지시키면서까지 그루먼과의 수의 계약은 어려웠기 때문에)
F-14의 개발
미해군의 제안 요구에 맥도넬 더글라스, 제너럴 다이나믹스, 그루먼, LTV, 노스아메리칸 등 5개사가 응모하였고, 비교 심사 결과 1969년 1월 그루먼의 모델 303E가 선정되어 F-14A라는 명칭으로 6기의 원형기 제작이 발주되었다.(추후 6기 추가 발주)
F-14A가 F6D와 F-111B를 거쳐 개발된 만큼 같은 성격을 이어받았음에도 발전된 모습으로, 보다 다목적 운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1950년대부터 미해군 항모 기동부대의 가장 큰 위협은 소련의 장거리미사일 폭격기였고, Tu-22 블라인더와 Tu-26 백파이어 같은 최신예 초음속 폭격기가 등장하면서 F6D 미사일리어 개발 당시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미사일리어 개발 당시에는 Tu-95 베어, Tu-16 배저가 주력기였지만 소련의 초음속 폭격기 등장으로 아음속 방공 함대 전투기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블라인더와 백파이어에 장착된 공대함 미사일 성능도 향상되어 미해군으로서는 소련의 공격 개시전에 선제공격을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어 레이더 FCS와 AAM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소련의 MiG 쇼크, 베트남전에서 MiG-17에 당한 아픈 기억들.. 이에 미해군은 F6D 개발 당시의 요구 사항을 한층 더 발전시켜 소련의 초음속 폭격기를 격추시킬 수 있게 초음속요격이 가능하고 소련의 신형 전투기 위험에 대처하고 이를 제압할 수 있는 기동성까지 요구하였다.
F-14의 개발 작업은 3단계로 나누어 시행되었다. 1단계는 F-111B의 기술을 이용하여 F-14A를 조기 개발하고 실전배치하며, 2단계에는 ATE 계획에 따라 F401-PW-400 엔진으로 교체하여 F-14B를 실전배치하고, 마지막 3단계에서는 ECCM 능력을 높인 경량 레이더 FCS를 장비한 F-14C를 배치한다는 계획이었다.(레이더 장비 개발이 기체 개발보다 기간이 더 많이 걸리기에..)
즉, F-14B는 엔진의 교환으로 기동성과 항속 능력을 향상시키고, F-14C는 무장 시스템을 강화시킨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대로 실행하기에는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게 된다.
F-14A는 급속도로 추진되었고 1969년 3월에 기본설계가 완료되었고, 5월에 목업 심사가 실시되었다. 6월에는 원형기 제작이, 11월에는 지상에서의 가변익 테스트를 실시하였고, 개발 원형 1호기는 1970년 11월에 완성되어 12월 21일에 첫 비행을 실시하였다. 12월 30일 두번째 비행에서는 유압시스템의 고장으로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무리한 일정 단축에 따른 재사고를 막기 위해 개발일정을 다소 늦추게 된다.(1971년말까지 총 7기의 개발 원형 7기 비행 테스트)
F-14A의 개발은 F-111B에서부터 축적된 여러 개발작업 덕분에 개발기간이 상당히 단축될 수 있었다. 특히 티타늄 합금을 구조 재료로 사용하여 중량 절감에 성공했고, 수평안전판 외부에 카본 복합재료를 사용하여 F-111B보다 약 3톤 가량 가벼워졌다. 그 결과 항모 운용상의 문제도 해결되었다.
F-14A의 최초 양산형은 개발 원형기를 포함하여 F-14A 톰캣이라는 제식 명칭이 붙여졌으며 부대배치는 1972년부터 실시되었다. 원래 톰캣의 양산 계획에 따르면 개발원형기 12기를 포함해서 497기를 생산할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로트 I, II의 각 6기씩 개발 원형기에 이어 FY71로 로트 III(26기), FY72로 로트 IV(48기), FY73으로 로트 V(48기) 등 모두 122기를 양산할 예정이었다. 이들 122기는 고정가격으로 계약하였으나 개발비 증가와 인플레이션 때문에 그루먼사는 가격 인상을 요구했고, 로트 VI부터는 새로운 가격에 생산하기로 협의하였다.
F-14의 가격 인상에 따라 미해병대에 F-14를 배치하려던 계획은 취소되었고 미해군은 해결책으로 저가의 공격 전투기 계획인 VFAX를 추진하여 F/A-18을 개발하게 된다.
- 컴뱃암즈(1997년 1월 / 16호), 이장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