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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재하지만, 다능하지 않은.
by 슈퍼노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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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08.12.31
    한편 조선에서는.. 광해군일기(광해군 10년, 1618년 무오 6 ~ 9월)
  2. 2008.12.31
    명군(明軍)
  3. 2008.12.31
    만주팔기(滿洲八旗)
  4. 2008.12.31
    청의 발호
  5. 2008.12.30
    대전차 자주포 Nashorn (1943)
  6. 2008.12.01
    F-5 All-story "형식"

6월 8일
→ 광해군은 파병군의 지휘를 맡을 도원수로 중국 정세에 능통하고 사리판단이 뛰어난 강홍립을 임명한다.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都元帥)로, 심돈(沈惇)을 도검찰사(都檢察使)로, 유몽룡(劉夢龍)을 함경 방어사로 삼았다.


6월 12일
→ 강홍립은 자신이 도원수가 된 것에 대해 사의를 표하지만, 광해군은 이를 무시하고 강홍립에 대해 도원수의 직을 맡을 것을 종용한다.

도원수 진령군(晉寧君) 강홍립(姜弘立)이 상소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장수를 임명하는 일은 옛사람들이 중하게 여겼고 적을 어떻게 상대했는지는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국가의 간성(干城)으로 나라를 지키는 일과 삼군(三軍)의 사명(司命)을 책임지는 그 임무가 어떠한 것입니까. 돌아보면 그 일이 중대하지 않습니까. 무사한 태평시대라 하더라도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더구나 이추(夷酋)가 틈을 엿보아 변방 사태가 심각해지는 오늘날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지난번 중국 군대가 패전하여 요좌(遼左)에서 경보를 알려오자 성상께서 부지런히 주선하시면서 체찰사와 원수를 의논해 천거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이에 온 나라가 두려움에 휩싸이면서 과연 어떤 인물이 이 임무를 맡아 이 일을 처리하게 될 것인가 하고 모두들 눈여겨 보았습니다. 심지어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남정네와 아낙네들까지도 모두 학수고대하였으니, 이는 그 인물의 됨됨이에 따라 일의 성패를 점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뒤에 삼가 듣건대 신의 성명도 원수를 의논해 천거한 명단 가운데 끼어있다고 하였으므로 신이 혼자 웃으면서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기를 ‘당당한 대국에 어찌 인재가 부족하기에 나처럼 내용이 없고 같잖은 사람까지도 장수 선발 대상에 끼어들었단 말인가. 그러나 비국의 신하가 혹 잘못 천거했다 하더라도 인물을 잘 알아보는 성상께서야 어찌 잘못 제수하시겠는가.’라고 하고는 이에 대해 전혀 의심을 하지도 않은 채 꿈에도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달 9일 이른 아침에 하리(下吏)가 와서는 원수의 후보 중에서 신의 이름에 낙점이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다가 이어 놀란 마음에 가슴이 뛰면서 당황스럽고 부끄러워 정신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사실(私室)에 엎드려 있으면서 공의(公議)가 발동되기만을 기다렸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또 여전히 조용하기만 하였으므로 신이 더욱 안타깝고 절박한 심정에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천지 부모 앞에 간절한 심경을 진달드리게 되었으니, 삼가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판단해 주소서.
신이 벼슬길에 올라 국록을 받은 지 이제 24년이 되는데 그동안 외람스럽게 발탁이 되어 재신(宰臣)의 반열에 이르렀습니다. 신처럼 미천한 자가 이토록 두텁게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므로 한번 죽지 않으면 우리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없다는 각오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뼛속 깊이 새겨 만 분의 일이라도 성과를 바치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재주와 식견이 미치지 못해 조금도 도와드린 일이 없었고 곤수의 직임을 나누어 맡아 고을을 지키면서도 잘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냇버들처럼 몸이 약한 탓으로 늙기도 전에 몸이 먼저 쇠해져 나이 겨우 50에 이와 머리카락이 모두 옛날과 달라졌는데, 거상(居喪) 중에 몇 차례 큰 병을 앓으면서 죽을 뻔한 적이 여러 번이나 있었습니다. 다행히 소생되기는 하였습니다만 이 뒤로는 정신이 멍해져 혼미하고 흐릿한 것이 마치 안개 속을 헤매는 것과 같아 일을 대하면 까마득한 심경이 되어 앞뒤도 분간을 못하게 되었으니 보통의 직무도 오히려 살피지 못할 걱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위 원수라는 직책이야말로 얼마나 중대한 책임이 수반되는 자리입니까. 그리고 지금 변방의 사태에 비추어 볼 때 신의 재질과 역량이 또 어떠하겠습니까. 한창 세력을 떨치는 오랑캐를 막아내고 중국 조정의 명령에 책응(策應)해야 할텐데, 성패의 기틀이란 숨 한번 쉬는 사이에 결정이 나고 응수하는 일도 눈앞에서 결판이 날 것이니, 비록 문무를 겸비한 자질을 소유하고 위망(威望)이 출중한 사람에게 맡긴다 하더라도 반드시 잘 처리하리라고 보장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신처럼 걸맞지 않는 자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신이야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이 일을 맡아보려 한다 해도 일을 망치는 것을 어떻게 할 것이며 명을 욕되게 하는 것은 또 어떻게 하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병들고 졸렬한 정상을 살피시고 신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해 주소서. 그리하여 다시 더 생각하시고 정신(廷臣) 중에서 택하시어 특별히 감당할 만한 사람에게 제수하심으로써 나랏일을 중하게 하고 신의 분수를 편하게 해주소서. 지극히 간절하게 명을 기다리는 심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모두 잘 알았다. 경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서 병사(兵事)를 익숙히 아니 지금 급한 때를 당하여 원수의 직책을 받기에 충분한데 비국에서도 모두 경을 천거했으므로 내가 마음속으로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다. 경은 나이도 많지 않은데 어찌 병들고 쇠약하기까지야 하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직무를 살피라.”


6월 17일
→ 파병 조선군에 대한 지휘권을 중국이 가진데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의주 부윤(義州府尹)의 장계를 보건대, 우리 나라의 군병을 만약 중국 장수로 하여금 관장하게 할 경우 조목조목 사단이 일어날 우려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구 참장(丘參將)이 우리 나라로 하여금 군문(軍門) 등 아문에 자문(咨文)을 보내 자기를 그 직책에 임명하도록 청하게 하려 하고 있는데, 그 뜻이 매우 근실하긴 합니다. 다만 그는 우리 나라에 대해 예전부터 유감을 품고 헛소문을 많이 지어내어 우리 나라를 모함해 빠뜨리는데 있는 힘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문으로 청하여 그가 우리 나라 군병을 관장하게까지 한다면 혹 그 인연으로 일을 낼 염려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의 청을 따라주지 않으면 더욱 심각하게 틈이 벌어질 것이니, 지금 응당 ‘노야(老爺)가 오래도록 강 하나를 사이에 둔 지역에 있어 우리 나라 사정을 익히 알고 있으니, 만약 이 임무를 맡아 우리 나라 병마를 관장하게만 된다면 우리 나라 입장에서야 어찌 그런 다행이 있겠는가. 그러나 군문·경략 등 아문의 체면이 삼엄하고 군기(軍機) 또한 지극히 중하니 우리 나라에서 이래라저래라 관여하는 것은 부당하다. 따라서 자보(咨報) 사이에 드러내는 일은 정말 감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차관이 도착하는 날을 기다려 형세를 살펴가며 주선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으로 곡진하게 말을 만들어 그가 성을 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겠습니다.
인하여 생각건대, 구 참장이 말한 것을 보면 군대를 지휘하는 장관 한 명이 역시 조만간 나올 것이 분명한데 장관의 직질이 참장이나 유격(遊擊)·부총(副摠) 사이를 벗어나지는 않을 듯하니, 그에 따른 접반관도 한 사람 미리 차출하여 준비하고 대기하게 함으로써 그때에 가서 전도되는 걱정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차관이 처음 도착했을 때 군병의 일로 문답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부윤이 장계에서 진달한 것이 매우 사리에 합당하니 그대로 하게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 감히 아룁니다.〉 ”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일단 본국의 사정을 가지고 이미 진주(陳奏)했고 보면 어찌 조정의 처치를 기다리지도 않고 미리 앞서 들여보내 징병할 수가 있겠는가. 설혹 경략이 뭐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이것이 성지(聖旨)를 받든 일이 아닌 이상 어찌 경솔하게 쾌히 따라줄 수 있겠는가. 따라서 구 참장에게도 ‘이미 주문(奏聞)을 한 이상 우선은 조정의 처치를 기다려야 하니 감히 미리 앞서서 진퇴하지는 못하겠다. 형세를 보아 가면서 조치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으로 말을 잘 만들어 마무리하는 것이 좋겠다. 설혹 들여보낸다 하더라도 성지를 기다리지도 않고 들여보내겠는가. 더 자세히 의논하여 선처토록 하라. 접반사는 차출해서 대기만 하도록 하고 들여보내지는 말라.”
 
하였다.
 

6월 19일
→ "노추(奴酋)"는 누르하치를 가리킨다.

흠차 순무 요동 지방 찬리 군무 겸 관비왜(欽差巡撫遼東地方贊理軍務兼官備倭) 도찰원 우첨도어사(都察院右僉都御史) 이(李)가 오랑캐에 관한 일로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본원에 도착한 귀국의 자문을 받아 보건대 본원의 자문을 잘 받았다 운운 하였습니다. 살펴 보건대, 노추(奴酋)가 대국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았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미 황상(皇上)께서 크게 한번 노하는 위엄을 떨치시어 3백 만의 탕금(帑金)을 내시고 10여 만 정병(精兵)을 동원하신 뒤 특별히 경략(經略)을 보내 정벌하는 일을 전담시키셨습니다. 저 보잘것없는 조무라기들이야 우리의 칼에 기름칠할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귀국이 우리의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는 만큼 보전하여 지키지 않을 수 없고 노추가 근접거리에 있는 만큼 방비책을 세워두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되기에, 부득불 자문을 보내 알려드리는 것일 따름입니다. 지금 도착한 자문 및 배신(陪臣)이 품정(稟呈)한 것을 보건대 충의(忠義)의 마음이 모두 인정될 뿐더러 신중하게 하려는 뜻을 더욱 알겠습니다. 귀국의 병마는 우선 의주(義州)에 주둔시켜 멀리서 성원을 하도록 하십시오. 일체의 진지(進止)에 관한 기의(機宜)는 사태의 진전을 조금 기다려 보면서 다시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단 귀국의 이자(移咨)를 받은 이상 회답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부디 검토하시어 그대로 시행하십시오. 〈 이 자문이 잘 도착되기를 빕니다.〉 ”
 
하였는데, 〈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6월 24일
→ 비변사는 도원수 강홍립이 자신이 쓸 인재를 선발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만, 광해군은 무분별한 자벽은 불가함을 내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원수(元帥)는 명을 받고 정벌을 전담하는 사람이니 그 체모가 본래 예사 장관들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좌막(佐幕)의 관원을 반드시 자벽토록 허락하면서 경악(經幄)의 신하나 근밀(近密)한 위치에서 모시는 신하라 할지라도 예외를 두지 않았으니 이는 그의 체면을 중하게 해주기 위해서일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대체로 군문(軍門)에서 호령하고 장수들을 제압할 즈음에는 막료(幕僚)의 경중에 따라 좌우되는 바가 적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강홍립(姜弘立)이 남이웅(南以雄)과 정준(鄭遵)을 종사관으로 데리고 가려 했을 때 상께서 그들을 데리고 가는 것을 모두 허락하지 않으셨으므로 사람들이 무척 낙심하였습니다. 이 뒤로는 데리고 가려는 종사관이 비록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데리고 가는 것을 허락하시어 원융(元戎)의 체면을 중하게 해 주시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원수의 종사관이 경악의 신하라 하더라도 자벽해서 데리고 갈 수 있는 것을 나 역시 알고 있다. 다만 밖에서 영건(營建)하고 있는 일을 한가한 공사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아뢰는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타당하다면 도감의 낭청이라고 해서 어찌 내보낼 수 없겠는가. 아뢴 뜻이 잘못되었다. 도감의 제조 이하 관원은 절대 다른 자리로 옮기지 말라.”
 
하였다.
 

6월 25일
→ 명과 후금의 전투시에 발생하는 피난민에 대한 대비를 이야기하고 있다.

전교하였다.
 
“중국군이 정벌할 때면 필시 뜻밖의 걱정거리가 많이 생길 것이다. 요동과 광령은 길이 멀기만 한데 그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만약 노적(奴賊)에게 쫓겨나 강을 건너 피난을 오기라도 한다면, 모르겠다만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또 장차 어떻게 그들을 먹여살릴 것인가. 이러한 일들에 관해 이경전(李慶全)이 들어갈 때에 경략에게 품의(稟議)하여 일일이 결정짓고 오도록 하라. 그리고 적호(賊胡)가 혹시라도 중국 사람의 모양으로 분장하고 중국 의복으로 바꿔 입고 온다면 또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비변사로 하여금 속히 의논해 처리케 하라.”
 

6월 28일
→ 화약제조에 필요한 염초의 원활한 공급을 지시하고 있다.

전교하였다.
 
“염초(焰硝)야말로 전투에 가장 필요한 물건인데 절사(節使)의 행차를 기다린다면 필시 늦어져 사기(事機)에 맞추지 못할 것이다. 곧바로 자문(咨文)을 보내 참작해서 무역해 오게 하는 동시에 이경전으로 하여금 극력 잘 도모해서 기필코 무역해 오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비변사로 하여금 자세히 의논해 〈 처리케 하라.〉 ”
 

7월 4일
→ 파병군에 대한 상세 보고. 조선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하여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군제를 개편한다.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궁수 중심 병력에서 임진왜란 이후로는 화력전 중심 병력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수병(三手兵)이며, 삼수병은 포수 / 사수 / 살수 이렇게 3개의 병과로 나누어진다.

조선 국왕이 군사를 일으켜 토역하는 일로 자문을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년 6월 19일 흠차 경략 요동 등처 군무 병부 좌시랑 겸 도찰원 우첨도어사(欽差經略遼東等處軍務兵部左侍郞兼都察院右僉都御史) 양(楊)이 일전의 사안으로 인하여 보내온 자문을 받았습니다.
 
보내온 자문의 뜻을 살펴서 이미 자문으로 회답함은 물론, 선발하여 놓은 병정 명수, 장령·편비의 성명, 수륙 요충, 누루하치의 근거지 근처의 지리 형세를 그린 그림 등 사항을 뒤에 하나하나 적어 이것을 함께 이자하니 살펴보고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자문이 이르기를 빕니다.
 
항목별로 적습니다. 도원수는 의정부 좌참찬 강홍립(姜弘立)【문직(文職).】, 중군관은 원임 절도사 이계선(李繼先)【무직(武職).】, 총령 대장 부원수는 평안도 절도사 김경서(金景瑞)【무직(武職).】, 중군관은 우후 안여눌(安汝訥)【무직(武職).】, 분령 편비의 방어사는 문희성(文希聖)【무직(武職).】, 좌조방장은 김응하(金應河)【무직(武職).】, 우조방장은 이일원(李一元)【무직(武職).】이며, 파수하고 있을 요충지는 강계(江界)·상토(上土)·만포(滿浦)·고산리(高山里)·위원(渭源)·이산(理山)·아이(阿耳)·벽동(碧潼)·창주(昌洲)·창성(昌城)·삭주(朔州)·의주(義州)입니다. 뽑아 놓은 병정 가운데 포수(砲手)는 3천 5백 명인데 평안도 포수가 1천 명, 전라도 포수가 1천 명, 충청도 포수가 1천 명, 황해도 포수가 5백 명입니다. 사수(射手)는 3천 5백 명인데, 평안도 사수가 1천 5백 명, 전라도 사수가 5백 명, 충청도 사수가 5백 명, 황해도 사수가 1천 명입니다. 살수(殺手)는 3천 명인데, 평안도 살수가 1천 명, 전라도 살수가 1천 명, 충청도 살수가 5백 명, 황해도 살수가 5백 명입니다. 이상을 통틀어 1만 명입니다. 누루하치의 근거지 근처의 지리 형세를 그리는 것은 별도로 한 장을 갖추어 그림을 그리고 설명을 붙였습니다. 〈 이상의 내용을 도어사(都御史) 양(楊)에게 자문합니다.〉 ”
 

7월 8일
→ 도원수 강홍립은 다시 자벽을 청하고, 이에 광해군은 두 사람을 허가한다.

도원수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특별히 어리석은 신을 염려하여 유장(儒將)으로 천거된 사람을 신의 종사관으로 삼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신은 진실로 감격하여 죽을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정호서와 유위가 연소하나 재주가 있고 기무에 익숙하니 이 두 사람을 그대로 데리고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금 가을의 방어하는 일이 닥쳐왔으니 군사에 관한 일이 바야흐로 급합니다. 나누어 나가서 검찰하고 감독하는 일은 종사관 두 사람이 형세상 겸하여 살피기가 어려우니 구례에 따라 한 사람을 마땅히 더 차출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유장으로 뽑힌 사람들이 혹은 외직에 있고 혹은 벌을 받았습니다. 박자응(朴自凝)은 일찍이 신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에 염철(鹽鐵)에 관한 일을 담당하여 재국(才局)이 심히 뛰어나고 일을 잘 처리하였는데 바야흐로 죄를 의논하는 중에 있습니다. 남궁경(南宮?)·유효립(柳孝立)·안경심(安景深)·남이웅(南以雄)·윤지양(尹知養)은 혹은 도청으로 혹은 낭청으로 다 도감에 있어서 감히 마음대로 데려가지 못합니다. 〈 상께서 처리하소서.〉 ”

하니, 전교하기를,
 
“남경궁과 정호서를 데리고 가라.”
 
하였다.
 

7월 9일
→ 조선에 귀화한 이들에 대한 관리들의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경상·전라·강원 감사에게는 하직할 때 일러 보내겠다."라는 전교에 비추어볼 때, 주로 여진족 출신의 귀화자들에 대한 배려임을 알 수 있다.

전교하였다.
 
“각읍의 귀화한 사람들에게 수령과 변장이 제멋대로 해를 끼치고 못살게 구는 폐습이 날로 심하다고 한다. 각별히 신칙하여 금지시키고 만약 그 습관을 고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일일이 계문하고 무거운 법으로 다스릴 것이며, 그들에게도 조정의 덕의에 대하여 잘 알아듣도록 타일러 그 거처에서 잘 살게 할 일을 〈 각도 감사에게 하유하라. 경상·전라·강원 감사에게는 하직할 때 일러 보내겠다.〉 ”
 

7월 14일
→ 중국은 조선에 파병을 다시금 압박하고 있다. 원수충(源秀忠)은 당시 일본 도쿠가와 막부의 제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말한다.

중국 아문에서 자문을 보내기를,
 
“흠차 정로 장군 진수 요동 지방 겸 비왜 통병관 우도독(欽差征虜將軍鎭守遼東地方兼備倭統兵官右都督) 이(李)는 왜의 정세에 관한 일로 자문을 보냅니다. 사유를 갖추어 보내온 조선국의 자문에 ‘일본(日本) 원수충(源秀忠)이 수뢰(秀賴)를 멸한 후에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은 즐겁게 지내며 바다는 안온하고 강은 맑아서 본국과 신의를 거듭 밝히어서 다시 옛날처럼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니 이상의 사실을 천조에 상주하여 전달해 주기를 청한다고 하였습니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는데, 이 자문이 진에 도착하였습니다.
 
대저 양국간에 동맹하는 것은 싸움을 그치고 병사를 쉬게 하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다만 왜의 정세가 예측할 수 없어서 더욱 마땅히 신중하게 사정을 헤아려서 뜻밖의 변란에 대비해서 만전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하나라도 착오가 있어서 적의 계교 속에 빠지면 후회하여도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오랑캐의 성품은 개나 양과 같아서 의리와 은혜를 거리낌없이 저버립니다. 근래 건주(建州) 이인(夷人) 누루하치는 수십 년 동안 우리 천조의 길러주는 은혜를 입었으며 시장을 열고 공물을 바치는 것을 허락받아 부강함을 이루었습니다. 우익이 겨우 이루어지니 드디어 배반할 마음이 생겨서 우리 성보(城堡)를 습격해서 파하고 우리 장사(將士)를 해쳤습니다. 이것은 왕법(王法)에 반드시 죽여야 되는 일이며 하늘의 토벌이 용서할 수 없는 자입니다. 지금 이미 명지(明旨)가 있으니, 정병 백만과 용장(勇將) 천 명을 선발하여서 길을 나누어 함께 진격해서 원악(元惡)을 사로잡아 고가(藁街)에 효수하고 구묘(九廟)에 진헌하여 이를 멸한 후에야 아침밥을 먹겠습니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귀국은 대대로 이 추(酋)와 이웃이 되어 매양 그 침략을 받았으니 아주 가까운 곳에서 생긴 환란이요 복심(腹心)에 생긴 질병입니다. 이치상으로 마음을 같이하여 군사를 일으켜 올바른 사람을 돕고 역적을 토벌해야겠습니다. 하물며 귀국은 옛날에 왜란을 당하여 천조에서 5, 6만 명의 군사를 보내고 내탕금 8백만 냥을 소비하면서 3, 4년 동안 추위와 더위를 겪어서 귀국 삼기(三畿)로 하여금 안정되게 하고 팔도가 맑고 깨끗해지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멸망한 것을 일으켜주고 끊어진 것을 이어주며 치욕을 씻어주고 흉인을 제거해 준 은혜이니 천백 세를 잊기 어려운 것입니다. 근래 왕사(王師)가 죄를 토벌하는 때를 당하여 귀국이 어찌 좌시하고 있을 수만 있겠습니까.
 
청컨대 자문 내의 사리(事理)를 살펴서 정병 3, 4만 명과 명장 10여 명을 선발하여 압록강에 주둔시켜 지키면서 7, 8월의 군사를 일으키는 때를 기다려 약속하여 모여 함께 나아가 이 큰 악인(惡人)을 멸하고 인하여 귀국을 위해 해로움을 제거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7월 16일
→ 당시 경략 양호는 대표적인 명나라의 조선통 중 하나였으며, 조선은 양 경략의 정보수집을 가능한 막으려고 노력했다. 양 경략은 조선정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지라 계속해서 파병의 압박을 여러 차례 가한다.

양 경략(楊經略)의 차관 우승은(于承恩)이 다시 자문을 가지고 우리 나라로 왔으므로 접반관 채승선(蔡承先)이 선천(宣川)에서 만나 보았는데 직접 서울로 오려고 하였다. 품획사 이경전(李慶全)이 정주(定州)에서 그와 만났는데 은 2백 냥을 써서 길을 막아 의주(義州)로 돌아가게 하였다. 대개 이때 왕이 명나라의 차관이 깊이 들어오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여 〈 전후 사신으로 하여금 반드시〉 막게 하였기 때문이다.

...

경략(經略)이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토벌하는 일로 자문을 보내기를,
 
“살펴보건대, 앞서 노추(奴酋)가 순리(順理)를 범함에 따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오랑캐의 소굴을 치려고 귀국에게 이자하여 정병 1만 명을 선발하여 왕의 변경상에 주둔시켜 때가 되면 토벌하기로 하였는데 아직까지 회답이 없습니다. 본 부원에서 재삼 주획하여 이 항(項)의 병마를 군사를 일으키는 때를 기다려서 요진(遼鎭)의 병마와 한데 합하여 나아가서 정벌하면 노추가 형세를 반드시 지탱하지 못하고 응당 연강을 향해 북쪽으로 달아날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마치 죄인을 잡지 못하면 비록 그 소굴을 비게 만들어도 오히려 뒷날의 우환이 되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좋은 계책은 지금 귀국이 다시 정예 병마 수천을 선발하여 강을 건너 서쪽으로 고산리(高山里)·만포(滿浦) 두 곳에 이르는 것인데, 그곳은 대략 창주(昌州)에서 1, 2백 리쯤 떨어졌으니 기미를 살펴 매복하고 있으면서 일면으로 사람을 차출해서 몰래 멀리 나아가 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가 적을 만날 경우 도망가 숨게 하면 우리 병사가 돌격하여 반드시 사로잡아 참할 것이니, 이것은 병가에서 많이 계획하는 승리하는 길입니다. 지금 마땅히 총병관 김응서(金應瑞)로 하여금 강서(江西) 일대에서, 모처에 병사를 주둔시키고 매복시킬 수 있는지 모처에서 싸움에 나아가 적을 죽이고 이길 수 있는지를 답사하여 살펴보게 하고, 무릇 역추가 숨거나 도망갈 경로가 있으면 하나씩 조사해서 정확하게 그림을 그려 보내서 계획하고 의논하여 공격하여 취하는 데 편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가을과 겨울에 들어서면 물이 넘칠 염려가 없고 군대를 출동시킬 시기가 멀지 않겠으므로 자문을 보내 재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자문을 보냅니다. 귀국이 번거롭겠지만 자문 내의 사리(事理)를 조사해 살펴보고 전 항의 병마 1만을 미리 선발하는 것은 물론 다시 정병 5, 6천 혹은 3, 4천을 선발하여 강을 건너 매복시켜 기미를 살펴 요격하게 할 것이며 미진한 일이 있으면 응당 상의하여 확정해서 속히 회자를 보내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7월 19일
→ 광해군은 더 이상의 파병으로 인한 피해가 없도록 비변사에 당부하고 있다.

전교하였다.
 
“우리 나라의 나약하고 잔폐한 군병으로는 결단코 경략이 말한 바에 따라 5, 6천 명을 더 뽑아 호지(胡地)에 들여보내서 매복하는 계책을 행할 수 없다. 근래에 왜정(倭情)이 불측하여 극히 염려스럽다. 1만 5, 6천 명을 뽑아 놓으면 비록 노추가 침범하는 근심이 없더라도 능히 스스로 지킬 수 있겠는가. 내 생각으로는 부득이하면 이미 뽑아 놓은 1만 명 중에서 수천 명을 덜어내어 천병 5, 6천과 힘을 합쳐 막고 지키고 매복하면 혹 갑자기 무너지는 적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국가의 존망과 성패에 관계된 것이니 십분 자세히 의논하여 결정하라. 회자도 속히 마련하여 곧 발송해서 차관이 오래도록 머무는 폐단이 없게 할 〈 일을 비변사에 말하라.〉 ”
 

7월 23일
→ 양 경략이 또 광해군을 파병건으로 압박하고 있다;;

양 경략(楊經略)이 군사를 일으켜 반역한 오랑캐를 토벌하는 일로 자문을 보내왔다.
 
“노추(奴酋)가 순리를 거역함에 따라 황제의 지시를 받들어 오랑캐의 소굴을 정벌하는 일로 양(兩) 경략(經略)이 조선 국왕에게 보낸 자문을 조사하여 보건대, ‘기병(騎兵) 만 명을 정돈하여 귀국의 국경상에 주둔시켜 미리 대비 태세를 갖추고 지시를 들을 것이며 때가 되면 한편으로는 정예병 수천 명을 선발하여 거느리고 강을 건너 고산리·만포 두 곳에 가서 기미를 살펴 매복하고 있다가 도망치는 적들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니, 대개 조선을 편안케 하려는 것입니다. 조선이 지금 아직도 회답을 보내지 않았는데 다만 배신이 하는 말과 보고에 의거하면 남해에서 왜를 막고 서북에서 오랑캐를 방비하느라 각진의 원래 지키고 있는 군사를 조발하기 어려워서 내지에 편성되어 있는 병졸을 뽑아 왔다 합니다. ‘건적(建賊)이 움추렸으니 충돌할 것이 근심됩니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 나라의 힘이 나누어지고 형세가 외로와서 근심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 한 말이고 전혀 결정적인 말이 없으니 다만 근왕(勤王)하려는 뜻을 보지 못하겠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해 힘쓰는 충성심도 보지 못하겠습니다. 어찌 갑자기 여러 해 전 몇만 리 밖인 운남(雲南) 지방의 내와 골짜기에서 군사를 징발하고 군량을 옮겨 3, 4년 동안 동국의 급박한 형세를 구원한 것을 잊었습니까.
 
또 요동(遼東)·계주(?州) 일대에서 군사와 말을 징발하여 보내고 군량과 말 먹일 풀을 운반하고 기계를 운반하는 일이 밤낮으로 이어져 역체(驛遞)에서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절사(節使)가 많이 지체되어 가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또 귀국에서 이미 전후에 회자하여 경사에 아뢰어서 대개 이미 오랑캐의 일을 갖추어 진달했습니다. 이번 올리는 주문 안의 정형은 전의 것에 더해진 것이 없고 다시 털끝만큼도 군사를 정돈하여 큰 나라를 돕겠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중외(中外)의 신망을 크게 잃는 것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본 부원의 경략과 군무가 조칙을 받들고 편의한 바에 따라 일을 행하며 다시 조선을 고무하고 있는데 지금 귀국이 이같이 활기가 없으며, 또 귀국 배신 이조 참판 박정길(朴鼎吉) 등이 외패(外牌)에 의해 길이 막혀 본관이 패의 일의 뜻을 살펴 곧 조선 국왕에게 자문을 보내었는데, 전의 자문을 살펴보았으면 급히 장수를 선발하고 군사를 정돈해서 지시를 듣고 군사를 합하여 노추의 소굴로 나아가 평정하는 공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관전(寬奠)·봉황성(鳳凰城) 등에는 대병이 성원하고 있으니 어찌 귀국이 멀리서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무릇 배신이 강을 건너 아국 땅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우선 가지고 있는 공문서 또는 자문을 사람을 파견하여 본원으로 보내서 조사하고 결정지어 시행하도록 하고 이어 이문을 발송하여 초록하여 참고하도록 할 것이니 그릇되게 하여 온편하지 않게 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8월 6일
→ 강홍립의 사직서을 광해군이 반려한다.

도원수 강홍립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답하기를,
 
“국사가 위급하니 사직하지 말고 몸조리한 뒤 속히 내려가서 삼군을 통솔하여 장대한 계책을 이루어 나의 근심을 덜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9월 9일
→ 파병건에 관련하여 소홀히 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교하였다.
 
“요즈음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 나날이 심해지고 있는데, 크고 작은 일이 모두 그렇지 않은 게 없다. 재자관(齎咨官)과 관련한 한 가지 일로 말해 보더라도 누차 바꾸느라 아직도 들여보내지 못하고 있으니, 지극히 한심하다. 만약 엄하게 법령을 세우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반드시 태만해지는 일이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중국이 정벌하는 데에 관련된 일에 있어서 태만히 할 경우, 죄가 무거운 자는 잡아들여 추국하여 가벼운 자는 파직하되 중국 사신이 왔을 때의 전례에 일체 의거하도록 거듭 밝혀 거행하라.”



- 출처 :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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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의 팔기병과 맞써 싸웠던 명군(明軍).
 
청의 팔기 제도가 완전국민개병제라면, 명은 징병제 + 모병제의 혼합이라 볼 수 있다.
명 건국초기에는 모병제였으나 나라가 안정을 찾게 되면서 명태조 주원장은 신하 유기(劉基)와 함께 원의 군사제도와 명의 모병제를 재검토하여 징병제와 모병제의 장점을 혼합한 위소제도(衛所制度)라고 하는 독특한 제도를 만들었다.
위소제도의 최소 단위는 백호(百戶)라고 하는데, 병사 100명 / 총기(總旗) 2명 / 소기(小旗) 10명, 도합 112명으로 구성되었다. 백호(百戶) 10개가 합쳐져 천호(千戶)를, 천호 5개를 합쳐서 1위(衛)를 만들었다.(1위 = 5,600명) 명태조 말년에는 전국에 329위(衛), 65천호(千戶)가 있었기 때문에 그 총병력은 이론상으로 약 180만이 되었다.(친군(親軍)이나 좌경군(左京軍) 같은 특수부대 제외)
중앙기구인 병부(兵部)가 위(衛)를 통솔하며, 병부 아래에 오군도독부(五軍都督部)와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 도사都司)가 있었다. 도독부(都督部)는 중, 좌, 우, 전, 후 5개로 나뉘어져 위의 감찰 및 검열, 군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고, 도사(都司)는 각 성(省)에 1개씩 설치 또는 국경지역에 설치되어 위(衛)를 통솔하고 관리했는데 대략 하나의 도사가 약 10 ~ 30개의 위를 관리했다.(국경지역에는 위소로 방어하는 것은 부족하다고 여겨 진수부(鎭守府), 총병관(總兵官)이 설치되었다. 나중에 이를 총괄하는 제독(提督), 총독(總督), 순무(巡撫)라고 하는 관리를 임명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조선 파병을 위해 제독 위에 경략(經略)이라는 관리직도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위소는 점점 늘어나 중국 전 지역에 약 500개 정도까지 늘어났고, 명은 여진족을 제어하기 위해 여진족을 위소로 편성하려 했으나 반발에 부딫혀 실패하였다. 더구나 명 말기에는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위소제도 역시 문제가 되었는데 병사들의 지위가 세습되었고 병사들이 전투보다는 지급받은 토지의 개간에 신경쓰는 바람에 위소제도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위소제도는 명 초기의 융성기를 지나자 바로 쇠퇴되었는데, 이는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국가권력이 쇠약해짐에 따라 더욱 두드러졌다. 특히 명의 경제 기초 중 하나인 군둔(軍屯)이 붕괴되면서(군호軍戶의 이탈로 인해..) 위소제도는 본래의 성격을 상실해버렸다.(명의 경제 기초는 민둔民屯 / 군둔 / 상둔商屯인데 민둔과 군둔의 규모가 비교적 컸다) 토목(土木)의 변(變) 당시에는 병력 소집이 어려워 민병제로 바꾸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도망치는 자들이 많아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향병(鄕兵)이라고 하는 임시소집 제도까지 출현하게 되었다.(향병의 대부분이 건달이나 불량배였다고 함)

이에 보다 못한 명의 무관들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각자 훈련시킨 사병(私兵)을 두게 되었다. 그 중에는 요동의 이여송(李如松)과 사천의 유연이 유명하였는데, 이들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보바이의 반란(1592년 귀화한 몽고사람 보바이가 명(明)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난을 일으킨 것으로 세력이 막강하였다. 이여송 장군이 평정시켰지만, 평정시키는데 반년이나 걸렸다) 등에서 활약하였다.


이렇게 군사 제도의 변천을 놓고 보면 명의 군사력은 약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다. 16세기에는 이성량 - 이여송과 두송(杜松) 같은 명장이 나타나 명의 북쪽 국경지역 방어를 굳건히 하였고, 바다에서는 호종헌(胡宗憲), 척계광(戚繼光) 등의 장군들이 나타나 왜구에 대해 철저히 방어하였다. 특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전투경력이 풍부한 왜군을 상대로 승리한 명군이었기에 전투력이 결코 약했다고 보기는 무리가 있다. 다만, 이후로 명의 재정이 부족해지고 국력이 피폐해진다가 당쟁으로 명의 정치혼란이 야기되어 이로 인해 군의 기강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은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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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의 취락 조직이자 군대 조직인 팔기의 기본적인 구성은 다음과 같다.

 - 1니루이 에젠(額眞)이 장정 300명을 통솔한다.
 - 1쟈라니(甲喇) 에젠이 5니루를 지휘한다.(1,500명)
 - 1쿠사이(固山) 에젠이 5쟈란을 지휘한다.(7,500명) 쿠사이 에젠 밑에는 좌 메이레니(梅勒) 에젠과 우 메이레니 에젠을 둔다.
 - 1쿠사는 모두 8집단이 있으며 각 쿠사이를 1기(旗)라 통칭한다.(여기서 에젠은 각 집단을 지휘하는 지휘관을 의미하며, 메이레니 에젠은 부지휘관을 뜻한다.)
 
이에 따르면 만주팔기는 모두 6만명이 되겠지만, 이는 전투가능인원만을 따진 것이며 실제로는 인원이 더 많아진다.
사실 각 에젠은 지휘관이 되기도 하지만 평시에는 마을의 수장으로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니루이 에젠은 전투나 수렵 때 300명의 성인 남자를 지휘하는 부대장이지만, 평시에는 300명의 부하와 그들의 식솔들을 부양하고 책임지는 촌장이 되는 것이다.
니루를 구성하는 300명의 성인 남자가 모두 병사가 되지는 않았다. 선출된 장정들은 갑사(甲士)라고 불리우며 샤르흐 전투에서는 갑사 50명이 1니루를 이루었다. 이는 딱 정해진 규칙은 아니며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변하기도 하는데, 샤르흐 전투에서 승리한 후금군은 명군의 전리품을 이용하여 1니루의 갑사를 100명으로 늘렸다.

집단을 8개로 나누어 8개 단위로 만들고, 이에 정황(正黃) / 양황 / 정홍(正紅) / 양홍 / 정백(正白) / 양백 / 정남(正藍) / 양남 팔기(八旗)를 배치한 것은 예로부터 북방 수렵민족간에 행해지던 몰이사냥 형식을 원형으로 하여 청태조가 창시한 것이다.(깃발 외곽에 선을 두른 것이 양- 이다.)

몰이사냥의 형식은 다음과 같다.
중앙부대의 황독(黃纛 : 큰 깃발을 의미)이 있는 곳은 "후에레"라고 하고 중앙부대의 좌우 날개에 있는 황백(黃白) 2기가 있는 곳을 "메이렌"이라고 한다. 그리고 각 메이렌은 각각 "우쓰리(만주어로 '가장자리'라는 뜻이다)"라 불리는 남(藍)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환진(環陣)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몰이사냥을 시작할 때는 황독을 중심으로 좌우로 열을 이뤄 달리고, 좌우의 선두는 남기를 지휘하여 수렵구역을 멀찍이 에워싸게 되는 것이다.
이 몰이사냥의 형식이 대규모로 수정되고, 부락조직을 정치제도로 발전시키고 사냥꾼 중심의 시스템이 군대로 변경되어 전투방식을 바꾼 것이 팔기 제도이다.
(전투 시에는 1쟈란(甲喇)이 기본 편성이 되어 중갑병이 선봉에 서고, 가벼운 망자(網子) 갑옷의 궁병이 제2선에서 사격을, 그리고 선발된 정예병들은 말을 타고 대기하고 있다가 부대의 불리한 곳을 돕는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니루이 에젠, 쿠사이 에젠은 집단을 통솔하지만 군사적 통솔이라기보다는 행정관료의 역할이 많았다. 따라서 팔기의 군대 조직화를 위해 관직명에도 명과 마찬가지로 총병, 부장, 유격, 비어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다. 쿠사이 에젠은 총병(總兵), 메이레니 에젠은 부장(副將), 쟈라니 에젠은 참장(參將)과 유격(遊擊), 니루이 에젠은 비어(備禦)에 임명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평시에는 보통 쿠사이 에젠 8명, 메이레니 에젠 16명, 쟈라니 에젠 40명, 니루이 에젠은 200명이었지만, 이들 외에도 쿠사를 관리하지 않는 총병, 자랸을 관리하지 않는 유격, 니루를 관리하지 않는 비어도 있는 관계로 전시가 되면 이들이 정규편제가 되어 임시 에젠이 되었다.(이들은 모두 "누르하치의 대신(大臣)"이라 불리웠다. 이들이 나중에 청의 정치에도 참여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은 모두 무관들이다.)
팔기를 각각 지휘하는 쿠사이 에젠 위에는 누르하치의 아들들이 각각 왕이 되어 각 기의 최고 책임자 및 상징적인 1인자가 되었고 이들을 팔왕(八王)이라 칭하였는데, 실제로는 그러지 못하였고 샤르흐 결전 때는 누르하치가 정황 / 양황기, 대왕(大王) 다이샨이 정홍 / 양홍기, 사왕(四王) 혼타이지가 정백기, 누르하치의 첫째 아들인 츄엔의 장자 토토가 양백기, 누르하치의 아우인 수르하치의 장자 이왕(二王) 아민이 양남기, 삼왕(三王) 만구르타이가 정남기를 각각 맡았다. 청태종의 시대에는 정황 / 양황 / 정남기를 황제 직속으로 하고, 나머지 5기에 대해 1기 1왕제를 실시하여 하5기가 상3기의 명령을 받드는 식으로 바꾸었다.(上三下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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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은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숙신(肅愼), 읍루,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직(女直)..
시대마다 부른 이름을 달랐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만주에서 살았다.
중국과 조선에 활, 말, 화살, 모피 등을 조공으로 바쳤고 그 댓가로 필요한 것을 얻어 살아갔다.
한 때는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를 대조영과 같이 건국하여 역사서에 그 이름을 알리기도 했고, 금(金)이라는 나라를 세워 중원을 위협한 적도 있었지만, 징기스칸(成吉思汗)의 원(元)에 정복당하여 겨우 부족들을 유지한채 만주에 물러나 있었다.

명(明)이 원을 패퇴시키자 일부 세력이 만주땅까지 도망갔기에, 명군은 만주까지 이들을 쫓아갔고 이윽고 멀리 흑룡강(黑龍江) 하류까지 이르렀다. 명의 성조 영락제(永樂帝)는 만주의 평안을 위해 힘을 쏟았는데, 누르칸(奴兒干) 도사(都司)라는 역소(役所)를 마련하고 그 밑에 184위(衛)를 설치하여 여진족장을 장(長)으로 삼아 관직을 주었다.
또한 농경지가 있는 요동(遼東)땅에는 한인(漢人)들이 살도록 하고 개원(開原), 무순(撫順), 관전(寬甸) 동쪽에 담을 둘러쌓아 이를 경계로 여진족이 서쪽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하였다.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쫓겨난 여진족은 예전에 그들의 조상들처럼 다시 수렵생활을 하며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명이 대이정책(對夷政策)을 실시하자 고생은 더욱 심화되었다.
1424년 영락제가 사망하자 오이라토[瓦刺], 타타르가 다시 일어나 중원의 북쪽에 압력을 가했고 1449년 오이라트의 습격으로 명황제 영종이 포로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土木의 變) 이를 틈타 여진은 이를 계기로 명의 구속에서 벗어나려 한다.
겨우 번성의 기회를 잡은 여진은 재기를 노렸지만, 곧 명-조선연합군에 정벌당하게 되고 다시 복속을 맹세하나 그것도 잠시. 북노(北虜) 타타르의 아루탄(俺答)이 명의 북변을 휩쓸고 다니자 명은 대부분의 병력을 북변으로 보내었고, 더군다나 남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여 군사를 남으로도 돌리니 요동의 병력이 비게 되었다. 이를 놓치지 않은 여진의 족장인 왕고, 왕태(王台), 왕올당(王兀堂)은 요동의 담을 넘어 요동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요동에는 명장 이성량(李成梁)이 버티고 있어 겨우 여진을 막아내게 된다.(이성량의 아들이 바로 이여송(李如松)이다.)

잠시 이 때의 여진족에 대해 살펴보자면, 누르하치가 태어나기 전에는 만주가 크게 해서여진(海西女眞), 건주여진(建州女眞), 야인여진(野人女眞)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가장 유서가 깊은 부족은 명 184위 중 하나인 건주위(建州衛)에서 시작된 건주여진으로, 건주위는 점점 영역을 넓혀 좌우양위(左右兩衛)를 세우게 된다.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시조는 당대의 족장 멘게치무르(猛哥帖木兒), 그 동생 한챠는 건주우위(建州右衛)를 만들었다. 건주우위는 형의 부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기에 창설초기부터 순탄치 않았다. 건주우위는 건주여진, 해서여진, 명나라 국경이 모두 접하는 위치에 있었고, 명나라의 압박과 해서여진의 신장으로 독립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능력이 매우 출중한 왕고라는 인물이 건주여진을 이끌기 시작했다.

고구려성의 폐허가 아직도 남아 있는 만주의 요충지 무순(撫順).
그곳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곳에는 혼하(渾河) 상류의 지류 가운데 하나인 소자하(蘇子河)가 흐르고 있고 그 소자하의 상류인 헤토아라에 근거지를 둔 건주우위. 그곳에는 닌쿠타베이제(六祖)라 불리는 6형제가 있었고, 그 중 넷째는 교챤가(覺昌安)라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교챤가에게는 5형제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넷째는 타쿠시(塔克世)라 불리웠던 자였고 그에게는 누르하치라는 출중한 아들이 있었다.
(육조부터 청조의 성씨(姓氏)인 아이신교로(愛新覺羅)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 아이신교로(愛新覺羅 : 애신각라) 라는 성씨의 신라 근원설을 주장하는 이가 간혹 있는데, 이 성씨가 음차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전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공식 기록에도 이와 관련된 문헌이 없음을 주지해야 하며, 애신각라의 신라 근원설이 근래 들어서 유행된 우리 나라 한문음역에 의한 추측성임을 강하게 주장한다;;

요동 침범으로 처형된 왕고에게는 아타이(阿台)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명은 아타이가 명을 배반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성량을 요동으로 파견한다.
명군은 아타이를 추격하게 되고 누르하치가 25살 되던 해(1583년), 아타이를 구레(古勒)성에 몰아놓게 된다. 사실 교챤가는 명과 아타이의 싸움에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아타이가 자신의 손주사위였기에 그를 구하기 위해 타쿠시를 데리고 구레성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명군은 아무런 죄가 없는 교챤가와 타쿠시를 모두 살해.(교챤가의 장남인 리돈은 용장으로 부족민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왜 교챤가가 장남을 두고 타쿠시를 데려갔는지는 아직 궁금증으로 남고 있다.)
이성량은 오인하여 죽인 것이라며 관직을 주어 누르하치를 위로했지만, 누르하치는 교챤가의 부하인 니칸와이란(尼堪外蘭)이 계략을 꾸민 배후일 것이라는 생각에 명군에 니칸와이란의 신병을 요청한다. 하지만 명군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신병 인도를 거부하고, 누르하치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니칸와이란을 처단한다.

사실 누르하치는 어렸을 때 계모 슬하에서 자랐으며, 계모와는 사이가 안 좋아서 19살 때 가출한 적도 있었다. 게다가 누르하치의 아버지인 타쿠시는 교챤가의 장자도 아니기에 누르하치가 씨족을 장악하는 것에 반대하는 친족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도박을 감행하여 명과 싸워 니칸와이란을 참수함으로서 조부의 원수를 갚았다는 명분을 내걸었고, 이를 이용해 부족민의 신망을 얻고 족장이 되어 실권을 장악한다.

누르하치가 조부의 원수를 갚고 족장이 되었을 무렵 건주여진의 스쿠스후호(蘇克索護河)부, 후네헤(渾河)부, 완양(完顔)부, 돈고(棟鄂)부, 제첸(哲陳)부, 장백산(長白山)의 노인(訥殷)부, 압록강(鴨綠江)부, 야인여진의 동해의 오슈우(窩集)부, 와루카(瓦爾喀)부, 쿠루카(庫爾喀)부, 해서여진(후룬(呼倫))의 우라(烏拉)부, 하다(哈達)부, 에호(葉赫)부, 호이하(輝發)부가 서로 왕을 자칭하며 싸우고 죽이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재빨리 부족의 기틀을 잡아 건주여진의 5개부를 통합했다, 다음에 장백산의 2개부와 야인여진 3개부를 복속시킨다. 송화강 유역이라는 지리적 이점과 명과의 교역을 통해 문화적 경제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해서여진, 즉 후룬은 누르하치의 발호에 위기감을 느끼고 4개부를 단합한다. 또한 타타르 동부의 부족들과 장백산의 일부를 끌여들여 9부 연합군을 조직하고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을 공략한다.
이것이 바로 샤르흐 결전과 더불어 누르하치 2대 위기 중 하나인 혼하 격전이다. 이 때는 누르하치가 35세 되던 해로, 누르하치는 혼하 부근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9부 연합군을 성공적으로 파쇄한다.
한편, 후룬은 대패하여 에호부의 부치베이레는 전사하고 우라부의 부지양타이베이레는 포로로 붙잡힌다. 누르하치는 아예 후룬을 자기 손 안에 넣을 수도 있었지만, 그의 기본 통치 개념인 "은혜와 위엄으로 시행한다."를 적용하여 부지양타이베이레를 귀국시키고, 에호부에 새로운 왕을 임명하여 후룬을 재건시켰다.
누르하치는 갑자기 부족을 멸망시켜 부족민의 원망을 사기보다는 때를 기다려 적들이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들기까지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그는 호이하부, 하다부, 우라부를 차례대로 멸망시키고 우수한 인재는 자신의 신하로 삼았다.

이리하여 만주를 거의 통일한 누르하치. 하지만 마지막 남은 에호부만이 남았으나 에호부의 뒤에는 명나라가 버티고 있었다.
이쯤의 여진족은 그 이전 삶의 방식이었던 수렵과 채집보다는 농경에 힘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명나라를 조금씩 자극하기 시작했다. 명은 누르하치에게 요동으로 넘어오지 말 것을 설득하고, 만약을 대비해 병력을 모아두기 시작했다.(1613)
이렇게 누르하치는 족장이 된 후 수십년 동안 만주 통일과 여진족의 건국 초석에 힘을 기울여 1616년, 중신들의 권유를 받아 왕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이라 했다. 이 때가 누르하치가 58세 되던 해였다.(나중에 누르하치의 아들 혼타이지(태종)가 "청(淸)"이라고 바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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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horn은 코뿔소라는 뜻이다>


Nashorn

1941년 6월, 독일군의 소련침공작전은 그럭저럭 성공하는듯 보였다.
하지만 독일육군의 주력이었던 3.7cm와 5cm 대전차포가 T-34와 KV-1을 만나 쓸모없는 쇳덩어리가 되면서 주춤하게 되고 이에 독일군은 급하게 신형 7.5cm포를 배치하여 4호 전차와 3호 돌격포의 주포를 강화하고, 마더 시리지를 비롯한 대전차 자주포를 실전에 투입시킨다.
한편, 1942년 독일군은 신형차량 개발과정에서 쓰다 남은 차체에 10.5cm 포와 12.8cm 포를 탑재한 대전차 자주포를 시험삼아 실전에 투입시켰는데 의외로 뛰어난 위력을 실감한다. 하지만 프로토타입이라 대량생산된건 아니기에 독일군은 신형 대전차 자주포의 능력과 필요성을 가늠하게 되었고 당시 크루프사에서 개발정이었던 71구경 8.8cm 대전차포 Pak43에 주목한다.(이 포는 나중에 티이거 II와 야크트 판터의 주포로 탑재된다.)


한편 독일군은 10.5cm 자주유탄포용으로 시험제작된 3호 전차와 4호 전차의 차체를 결합한 섀시를 기반으로 하여 15cm 유탄포 sFH18을 탑재시킨 자주포 Hummel에 사용하려던 참이었고, 이를 1943년 5월부터 200대 제조할 예정이었다.(3/4호 전차간 공통점이 많아 부품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독일군의 의지) 대전차 자주포 차체로 활용했던 1 ~ 3호 전차에는 7.5cm 급 이상의 포를 탑재할 수 없어 새로운 차체를 물색하던 독일군은 앞으로 생산될 Hummel 차체에 Pak43을 얹어 시험해보기로 하고, 1942년 10월 시험기가 생산된다. 시험기에 감탄한 히틀러는 Hummel 생산분 200대 중 100대에 Pak43을 탑재할 것을 명령한다.
Pak43을 탑재한 100대의 Hummel은 Hornisse(말벌)이라고 명명되었지만, 곤충의 이름은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한다는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Nashorn으로 변경되었다.


<동계위장된 Nashorn>

Nashorn 생산을 위해 포는 크루프, 차체는 알케트사가 맡아 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예정된 제작수량은 1943년 5월 12일까지 총 500대였다.
그러나 Pak43의 제작은 계속 늦어졌고, 다급해진 크루프사는 Pak43 포가에 Pak41 포신과 폐쇄장치를 얹은 Pak43/41의 차량탑재형인 Pak43/1을 만들어 Nashorn에 장착한다.(1943년초) 1943년 3월 1일에까지 Pak43/41은 23문이 겨우 만들어졌고 독일군의 하계공세 시점에는 85대, 1943년말에는 345대, 1945년 5월 9일(독일군 항복)까지는 총 494대 제작되었다. 하지만 Nashorn의 위력은 매우 뛰어나서 독일의 모든 전선에 투입되었고, 특히 소련군 전차를 1발 격파할 수 있었던건 구축전차 Ferdinand와 대전차 자주포 Nashorn 밖에 없었다.


 


Hummel

Hummel은 Nashorn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차체의 기본구조는 Nashorn과 동일하다. 다만 탑재하는 포가 다른데, 원래 Hummel은 10.5cm 유탄포를 탑재하여 경야전 자주유탄포로 쓸 예정이었으나 개발 도중에 15cm 포로 변경되었다.
(구경이 커지게 되어 Hummel의 탄약휴대량은 18발로 감소되었고, 이 때문에 포신없는 Hummel을 개조한 전용탄약운반차가 Hummel을 따라다니게 된다.)

<이것은 Hummel의 프로토타입>






<참고로, Hummel은 Bubble Bee.. 왕벌이라는 뜻이다>
AND
 
F-5A Freedom Fighter
시리즈 최초의 양산형인 F-5A는 시험제작기 YF-5A 3대와 강도시험기 XF-5A 1대를 포함하여 모두 621대가 생산되었다.
해외 수출용으로 개발되었기에 대부분이 MAP(Military Assistance Program : 무상원조계획)용으로 1972년 6월까지 각국에 배치되었다.
기본적으로 당초 계획한 N-156F를 구체화하면서 기체 각 부분의 강도를 강화하여, 주익 아래 하드 포인트를 좌우측에 각 2군데씩 마련하였다. 또한 주익 끝에는 AIM-9 사이드와인더 전용 발사대인 Aero 3B 런쳐 또는 50 갤런짜리 탱크를 장착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사용 국가의 희망에 따라 공중급유용 프로브를 장착했다.
F-5A의 시작 1, 2호기는 애프터 버너가 없는 GE의 YJ85-1 엔진이 장착되었으며, 시작 3호기부터는 애프터 버너가 있는 J85-GE-5를 장착했다.(추후에 시작 1, 2호기도 같은 엔진으로 변경) 양산형부터는 추력이 향상된 J85-GE13을 탑재하게 되었다.
F-5A의 기수는 뾰족하고 검은색으로 도장을 하여 마치 소형 레이더가 탑재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공기역학적 관점에서 모양을 그렇게 한 것일뿐 레이더는 없다. 원래는 수색 레이더와 관성항법장치를 조합한 휴즈의 TARAN(Tactical Attack and Navigator)를 장착하려 했으나 F-5A를 구입하려는 국가들이 저렴한 가격과 높은 정비성을 요구했기에 장착하지 않았고 사격조준장치도 단순 광학 조준기를 사용했다.
게다가 전자장비도 최대한 단순화하여 통신장비는 UHF 라디오, ADF, TACAN 정도만 집어넣어 50년대 수준과 비슷하게 했다. 새로운 전투기이면서도 장비의 수준은 그대로였지만, 이런 단순함 때문에 오히려 기체의 신뢰성과 정비성이 향상되어 F-5가 성공하게 된 장점이 되었다.

 
F-5B Freedom Fighter
이 기체는 F-5A의 파일럿 훈련을 위한 복좌형으로 동체는 T-38을 사용했다. 반면에 주익과 공기흡입구는 F-5A를 사용하여 복좌형인데도 F-5A보다 동체 길이가 약 26cm 짧다.
연료탑재량이 작아 항속거리가 짧아진 것을 제외하면 F-5A와 기본적인 성능은 동일하다. 그래서 T-38과는 달리 훈련과 전투 임무에 모두 사용이 가능하기에 경제적인 이유로 별도의 훈련기 운행이 어려운 국가에서 운용하기에 최적이었다.
 

F-5C Scoshi Tiger
미공군이 F-5A의 성능 테스트를 위해 스코시 타이거라는 특무부대를 편성하여 베트남전에 투입하였다. 이 부대에서 쓰였던 기체는 F-5A를 개조한 것으로 공중급유 프로브 장착, 엔진 아래 부분에 장갑판 설치, 5개의 파일런을 긴급투하가 가능하게 하였다. 미공군은 테스트 후에 이를 엔진 개량과 함께 C형으로 계획했지만 비용 문제로 취소되었다.


F-5D

F-5C의 복좌형. 단지 계획서상에만 존재한다.

 
F-5E/F Tiger II

MiG-21의 등장으로 F-5A/B를 대체할 해외공여용 전투기 개발이 요구되었으며 그 결과 나온 것이 기존의 전투기를 원형으로 개발된 F-5E이다.
F-5A의 엔진을 교체, 연료탱크의 대형화, 동체 재설계, 수색 레이더 장비 등의 개선을 통하여 기존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전투기가 되었다.
F-5F는 F-5E의 복좌형이다.

 

KF-5E/F 제공호
대한항공이 국내에서 조립한 F-5. 레이더 및 조종 기부에 대한 개선이 이루어졌으며 채프/플레어를 장착했다.


CF-5A/D(CF-116)

캐나테어사가 네덜란드형 F-5를 양산하여 캐나다 공군에 인도한 기체.

 
T-38 Talon

F-5의 모체가 되는 고등훈련기.

 
RF-5A/E Tigereye
RF-5A는 F-5A의 페어링에 카메라를 장착하여 정찰용으로 사용한 기체. 중소국가에서 저예산 정찰기로 운용되었다. RF-5E는 F-5E에 카메라를 장착한 것으로 RF-5A에 비해 더 많은 종류의 센서 탑재가 가능하다.


F-20 Tigershark (F-5G)
중소국가와 제3세계 국가에 수출용으로, F-16에 대항하기 위해 개발된 F-5E의 업그레이드 기종. 기본적으로 동체는 F-5E와 비슷하지만, 단발 엔진이기에 기체 내부의 설계를 완전히 재설계했다. 기본성능 및 유지보수면에서는  타이거샤크가 유리했지만, 시험기의 잦은 추락사고로 인해 1986년 개발사업이 종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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